유기력 일기
지우고 싶지만 지워지지 않는 것들을 추억이라 우기는 것.
이번에도 통할까?
2년 만의 판서에 마커가 이렇게 무거운 것이었나 싶다.
키보드 위에서는 그렇게 재빠르고 유연하던 손가락이 왜 이리 내 맘대로 안되는지.
획수가 많은 단어들은 줄여 쓰기 시작했다.
바르셀로나는 바.셀
라틴아메리카는 라.아
발음기호는 발.기
참지 못하고 웃어버린 몇 학생 덕에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아 웃지 마'하고는 황급히 지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끝까지 모른 체했어야 했나 싶고.
ㅂㄱ 지울 때 기억도 같이 지웠어야 했는데 괴롭다.
퇴근하자마자 교사 친구 수연이에게 전화를 했더니
이제 학생들 사이에 내 별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라 했다.
지우고 싶지만 지워지지 않는 것들을 추억이라 우기는 것.
이번에도 통할까?
12년 차.
아직도 수업 중에 얼굴 빨개질 일이 있다는 것이
왠지 설레기도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닌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