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은 무서웠다. 무서워서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물론 첫 글자부터 무서웠던 것은 아니다. 이 책이 무서워지기 시작한 건 그녀가 나타나고부터였다. 두려운 만큼 보고 싶었다. 귀신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다음 쪽이 또 그 다음 쪽이, 계속해서 그렇게 모든 글자들이 끊임없이 무서웠다.
글자들의 나열이야. 글자들의 나열이고 그리고 이것은 현실이 아니야. 하고 생각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 글자들은 책상 위 컵 안에서 녹아가는 얼음만큼이나 현실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는 나와 너무 닮아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책이 무섭진 않았다. 책 속의 그녀가 무서웠다. 책 속의 그녀가 당장이라도 나처럼 책을 읽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글자들을 보았을 때 그녀는 물을 마시고 있었다. 물을 마시고선 말을 하려고 했었다.
이 책을 쓴 현수라는 여자. 아니, 여자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 작가가 무서웠다. 아마도 그 작가는 이 책을, 이 글자들을 쓰려고 꽤나 애를 썼겠지. 그러니까 이만큼이나 사람 같은 걸 만들었겠지. 아마도 그의 곁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내가 아는 사람일지도 몰라.
내가 왜 이 책을 빼왔을까.
그 여자. 연희는 정말로 나와 꼭 닮아 있었다. 버스를 탈 땐 덥거나 춥거나 창문을 연다는 것도, 그랬구나, 라는 말을 자주 하는 것도, 그리고 노란 색을 좋아한다는 것도. 무엇하나 닮지 않은 게 없을 정도로 나와 닮아있었다. 연희는 아마도 물을 마시며 그런 말을 하겠지.
엄마. 나는 엄마가 좋아.
엄마는 어떤 일에도 큰 반응을 보이는 법이 없었다. 세월은 엄마의 감정을 잡아먹었다. 시간은 엄마의 수많은 것들을 잡아먹었고 대신 나이와 그에 걸 맞는 주름을 선물해주었다. 엄마는 앗아간 것에 미련이 없었고 선물해 준 것에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그저 받아들였을 뿐이다. 바뀌는 세월을 또 시간을 시대를 그냥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렇게 받아들이다보니 무뎌졌을 뿐이다. 엄마는 수용적인 여자였다. 갱년기가 왔을 때도 이러다 말겠지. 하고 말했을 뿐이다. 나는 아직도 엄마를 다 모른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엄마는 항상 그랬다. 항상 그렇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런 엄마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반대로 나는 엄마의 무감각함마저 사랑했다. 당신은 나의 엄마니까. 엄마는 그래도 마땅한 존재니까.
엄마. 나는 엄마가 좋아.
나는 물을 마시며 혹은 소파에 앉으며 혹은 티브이를 보며 가끔씩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약간 희미한 미소를 지은 것 같은 적이 있었지만 그건 내 추측일 뿐이었다. 사실은 엄마가 불쌍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엄마가 너무 불쌍해서 울고 싶어.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정말로 엄마가 울어버릴 까봐 그냥 엄마가 좋다고 말했다. 엄마는 나를 키우느라 당신의 시간을 버린 대단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나 때문에 무뎌졌는지도 모른다. 엄마를 늙게 만든 건 시간이 아니라 나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연희도 물을 마시며 엄마가 좋다고 할지도 몰라. 정말로 그러면 엄마한테 말해야지. 엄마는 또 아무렇지 않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엄마가 아무렇지 않게 반응하면 나는 아무렇지 않은 일을 겪은 게 될 것이다.
이윽고 연희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나는 엄마가 좋아. 그렇게 말하고 쓰게 웃었다. 물을 마시거나 소파에 앉으며 아주 평안한 날에 문득 그렇게 말하며 쓰게 웃었다. 연희의 엄마는 그런 연희를 보면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연희는 분명 예쁜, 정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쁜 딸이었지만 어쩐지 그 말을 건넬 때만큼은 나를 엄마가 아닌 한 인간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연희를 독립적인 인간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연희는 내 딸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쁜 딸. 그렇기 때문에 나를 엄마가 아닌 한 사람으로 봐주는 연희에게 무어라고 말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의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연희의 엄마처럼 그렇게 생각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연희가 엄마. 나는 엄마가 좋아. 하고 이야기 한 게 무섭지 않을 만큼 궁금해졌다. 연희가 이 다음으로 무엇을 할 건지 보다도 더 당신이 그리워졌다. 당신을 만나서 말해주고 싶었다.
이상하게 엄마를 생각하면 어떤 일들도 아무렇지 않은 일처럼 느껴져. 엄마. 나는 엄마가 좋아.
그렇게 당신이 사무치도록 그리워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밖은 이미 어두컴컴했지만 그래도 달이 나를 꾸준히 쫒아왔기에 무섭진 않았다. 달은 19일인데도 아주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원래 둥그랬다는 듯이. 한 번도 둥그렇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듯이, 흠집 없는 둥그럼이었다.
나는 연희처럼 버스에 타서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가 슬쩍 슬쩍 비껴만 갔다. 얘들아, 나를 미워하지 마. 바람이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럴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럴 것만 같은 일들이 가끔 일어나곤 하니까. 그 때 가서 억울해 하는 건 소용이 없으니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들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하는 거다. 지금의 나는 아까의 나와는 달리 조금 초연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래.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쩌면 있을 수도 있지. 연희는 그런 아이인거야. 누군가 나와 비슷한 사람을 보고 쓴 이야긴 거야. 그러니까 연희도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아까는 말도 안 된다고 부득부득 우겼던 것이 이렇게 스르륵 녹기도 한다. 사람이란 참 간사한 동물이다. 어쩌면 동물이라고 하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복잡한지도 모른다. 그런 생명체다.
엄마. 오늘 도서관에 갔어. 책을 하나 봤는데 나 같은 애가 있었어. 걔도 버스에서 창문을 연대. 걔도 그랬구나, 하는 말을 자주 한 대. 그리고 노란색을 좋아한대. 신기하지? 난 아까 엄청 놀랐어. 작가 이름은 현수였어. 걔 이름은 연희였어. 연희. 근데 난 좀 무서웠어. 걔가 나랑 똑같은 행동을 해서 무서웠어. 걔도 나처럼 엄마가 좋다고 말했어. 글자로 말했어. 귀로 듣는 것만 같았어. 엄마? 듣고 있어?
엄마는 듣고 있는 걸까. 내 말을 한 치의 오류도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그래, 엄마? 되묻고 싶었지만 당신의 표정을 보니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당신은 무언가를 참는 것도 같았고 혹은 참지 못하는 것도 같았다. 나는 듣고 있냐는 말 대신 괜찮아? 라고 말했다.
괜찮아. 엄마는 역시나 세 글자를 말하고 그 이후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알던 엄마의 모습이었다. 예상한 엄마의 얼굴이었다. 그런 사람이니까, 그랬던 사람이니까 엄만. 묘하게 마음 한 구석이 평안해졌다.
엄마.
왜? 그냥. 좋아서. 엄마는 또 슬쩍 웃었다. 확실히 착각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이전의 것들도 착각이 아니지 않을까?
엄마. 왜? 난 엄마가 좋아. 나는 내 진심이 전달되었기를 바라며 딸로서 당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엄마는 충분히 알아들은 것 같았다. 아니, 엄마는 내 신호를 알아듣지 못한 적이 없었다. 당신은 그런 엄마였다.
잠에 들 때쯤이 되어서야 다시 연희가 떠올랐다. 그리고 또 다른 사실이 하나 떠올랐다. 엄마 이름이 수현이라는 거. 아마도 현수, 그 여자는 엄마일지도 모른다. 현수는 딸이 있을지도 모른다. 현수의 딸은 버스 창문 열기를 좋아하고, 그랬나요, 라는 말을 자주하고, 노란색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수의 딸은 말한다. 엄마. 난 엄마가 좋아.
물을 마실 때나 소파에 앉을 때, 그런 아주 평안한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