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파악 할 필요는 없다.
<이유 없음>이 존재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지금 잘해주었다고 해서 나중에 더 받을 생각이나 돌아올 이익을 따질 생각이 없다. 이유 없이 그가 좋았고 이유 없이 그에게 잘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누군가는 <이유 없음>에 의문을 가진다. 왜? 어째서인데? 나도 모른다. 그냥 그러고 싶었을 뿐이야.
<이유 없음>은 꽤나 잘 써먹을 수 있는 구실이다. 왜 그랬는데? 딱히 이유는 없어. 그렇게 대답하면 상대방도 더 이상 과하게 캐묻기는 힘들어진다. 없다는 데 어쩔 것인가! 그래서 나는 이유 없음이 이유가 되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존재를 부정하지만 더불어 존재를 인식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없다’는 것은 불편함이나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빈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무언가가 생길 때 까지 잠시 자리를 비워두는 것이다. 이유도 마찬가지다. 언제든 채울 수 있게 ‘없음’으로 비워둘 수 있는 것이다. 비워두고선 적절한데다가 마음에 드는 것이 나타나면 끼워 넣고, 아, 그 때 그래서 그랬나, 하고 생각하면 된다. 없다는 것은 어쩌면 여유이다. 당장 다급히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다.
그렇게 <이유 없음>을 어떤 일의 이유로 설정해 놓으면 의뭉스러운 부분이 남아있더라도 잠시 동안은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이유가 없어서 그랬으므로 단지 한 번 쯤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그때 왜 그랬지? 하며 묻게 되어도, 몰라, 이유가 없대잖아. 하곤 잊어버리면 된다. 만약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 때서야 찾으면 그만이다. 당장 모든 것을 파악해야 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 어떻게 가득 차 있기만 하겠는가? 빈 공간이 있어야 숨도 쉬고 하지 않을까.
그렇게 오늘도 이유 없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미워한다. 어제는 줍지 않았던 쓰레기를 오늘은 이유 없이 주워보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던 색이 이유 없이 마음에 들기도 한다.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한 구석쯤 비우기로 한다. 그것들의 존재를 인식하면서도, 의문스럽게 남겨두는 것은 아마도 여유가 필요하기 때문인 걸까.
이런 생각들을 한다. 그러나 <이유 없음>은 오늘도, 여전히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