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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지연 Dec 25. 2022

92. 눈사람은 녹을 틈이 없었다

1968년, 성탄제 - 강영은 

부산에도 눈이 내렸다. 오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눈은 너그럽게도 넉넉하게 내렸다. 펑펑내리는 눈을 보며 사람들은 행복한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냈다. 난로를 피우며 창밖에 솜털 같은 눈송이를 보았다. 눈 굴리는 어린아이들을 보며 어릴 적 혓바닥을 내밀고 눈맛을 보겠다고 야단이었던 때가 떠올랐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던 고드름과 눈 결정. 내가 기억하는 눈은 따듯했다.


소복소복 소리가 들릴 정도로 세상이 고요했다. 뽀드득거리는 눈 밟는 소리가 들리면 우리들의 웃음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렸다. 눈사람은 녹을 틈이 없었다. 우리의 웃음이 눈사람을 한 개, 두 개, 세 개, 네 개 눈을 굴리고 또 굴렸다. 서로의 눈과 코가 빨개졌지만 상관없었다. 눈사람이 추울까 봐 서로의 목도리를 둘러주고 모자를 씌워주었다. 나무 위에 올라가 솔방울을 따다 눈을 만들고, 나뭇가지를 꺾어다 손이 되어주었다.


제각기 모양의 울퉁불퉁한 눈사람들이 거리에 가득 찼다. 손이 녹은 눈으로 꽁꽁 얼었다. 시간 가는 줄 몰라 저녁이 찾아오고 퇴근한 아빠의 부름에 집으로 들어갔다. 눈에 흠뻑 젖어 집에 들어가, 옷을 다 벗고 보일러를 켜놓은 방에 몸을 녹였다. 창문을 열고 눈사람이 녹을까 바라보면 눈사람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하루 종일 눈사람 만들기 작업에 고된 나는 일찍 곯아떨어지고 아침이 되면 일어나자마자 눈사람을 찾았다. 역시나 그대로 있는 눈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밥을 먹곤 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녹을 틈 없이 추억이 쏟아진다. 어른이 되면 걱정이 많아진다. 이 쏟아지는 눈을 보면 출근길을 걱정하고, 추위를 고민해야 한다. 현실의 등에 밀려 추억이 나가떨어진다. 나는 그 추억을 주워다 미련을 부려보았다. 한 번쯤은 철없이, 어리광 부리듯 그때를 그리워해 봐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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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터는 소리가 얼어붙어 있었다

낡은 신발들을 지키느라

눈사람은 녹을 틈이 없었다

1968년 성탄제, 강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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