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이정도로 왕따를 당했습니다
‘고작’
나의 왕따를 고백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타인에게 나의 왕따는 ‘고작’이라는 단어로 정의 내려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또 상처의 크기는 모호한 언어로 표현이 된다.
“많이 아팠어”
“조금 아팠어”
우리는 아픔의 크기를 정확하게 표현 할 수 있을까?
“1cm 정도 아팠어. 5mm 정도 우울했던거 같아”
라고 말하면 쉽게 이해를 해줄 수 있을까? 사람들은 남의 아픔에 잘 공감한다. 때로는 함부로 공감하기도 한다. 함부로 라고 말한 것은 나의 왕따는 남들이 보기엔 ‘고작’이라고 단정 지어져
“나도 그정도는 당해봤었어”
“그정도야 어릴적 싸움 아닌가”
위로가 아닌 폭력적인 공감을 당해보았다. 그럴 수 있다. 남들이 보기엔 ‘고작’이라 할 만큼 그렇게 긴시간 지속된 왕따도 아니었다. 담임선생님도 물리적 폭력이 없었기에, 단순한 의견충돌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나는 고작 그 정도의 왕따로 10년간 같은 꿈에 시달렸다. 기억을 억누르다 공황장애, 불안장애, 피해망상 등 5가지 정신장애를 안고 병원에 한 달 넘게 입원하기도했다. 이렇게 말하면 더 이상 누구도 ‘고작’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내가 긴 이야기를 풀어 이만큼 아프다고 말해야 드디어 말을 멈춘다.
길고긴 설명이 있어야, 이해와 위로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위로도, 정직한 나를 위한 위로인지 잘 모르겠다. 내가 듣고 싶은말은
'괜찮아질거야, 힘내'
라는 억지로 내가 힘을 내어야할거 같은 위로들이 아니다.
이 책이 그런 함부로 전하는 위로가 아니길. 아픔의 크기가 제각각이듯, 그 크기를 받아내는 사람의 마음의 크기도 제각각이다. 나는 아픔을 받아내기에 마음이 작아. 받아내지 못한 것이다. 마음의 크기가 작더라도 그건 내 탓이 아니다. 그 아픔을 준 사람의 잘못이다.
더불어 이 책이 나를 괴롭혔던 그 친구들의 죄책감이되어 신발속의 돌맹이처럼, 목구멍의 생선가시처럼 불편함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