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

나에게 사라지는 것들

by 채지연

사라지는 것들 – 관계

문득 물건 하나가 떠올랐다. 꽤 자주 썼던 물건인데 어디에 두었지, 하고 방안을 뒤적거렸다. 분명 손에 익을 만큼 자주 사용했는데 어느새인가 잊힐 만큼 멀어져 사라졌다. 이곳저곳을 살펴보아도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소홀히 대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소중히 대하지도 않았지만 왜 사라진 걸까. 내가 그 물건에 대한 마음이 부족했던 걸까. 결국 물건을 찾지 못해 새로 샀다. 이번에 잃어버리지 않게 그 물건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사람 관계도 그러하다. 매일 보고 매일 연락하던 사이에 어떠한 사건이 발생한 것도 아닌데 어느새 그 사람과 나 사이에 강 하나가 생긴 듯 멀어져 있다. 다시 가까워질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러기에는 조금 멋쩍은 관계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점점 내 주위에는 많은 강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나는 그런 것들에 미련이 많은 편이라 애써 어떻게든 다시 되돌리려고 노력한다. 노력하는 것에 비하여 결과는 좋은 편이 아니다. 이미 사라진 물건을 열심히 찾는다고 하더라도 찾을 가능성이 희박하듯, 이미 멀어진 관계를 억지로 끌어당긴다고 한들 다시 좋아질 가능성은 작다.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관계를 이해하고 놓아줄 줄 아는 것. 미련을 부리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할 때인 것 같다.


사라지는 것들 - 열등감

마음에 묵은 감정들이 있다. 누군가를 향한 미움이라든지 열등감. 상대는 모르지만 나만 가지고 있는 감정. 홀로 묵묵히 쌓고 쌓아 흉측한 얼굴을 가진 못된 감정들이 있다. 어떨 때는 숨겨봐도 그 감정이 티가 나 사이가 멀어지기도 한다. 나 자신이 그 감정 때문에 괴로울 만큼 고통스러운데, 사라지지 않는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온통 그 상대와 나를 비교하고 나의 모난 지점을 생각해 내가 미워지기까지 한다. 나 자신의 모자란 점은 왜 이렇게 크게 보이는 건지 고치고 싶어도 고쳐지지 않는다. 다들 그렇게 성장하는 거라고 쉽게 말한다. 성장이 아니라 그냥 고약한 ‘질투’일 뿐이다. 상대도 거저 얻은 결과가 아닐 텐데 나의 못된 마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억지로 마음을 접으려 할 수록 더 마음은 반항이 생기는지 더 커진다. 치기 어린 질투심이다. 나 자신을 비난하고 매질해도 질투심과 열등감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런 마음이 들수록 죄책감마저 들어 마음이 지친다. 사람이 미운 게 아닌 그 사람의 재능을 가지지 못한 내가 미운 것이다. 왜 나는 저만큼을 하지 못할까, 나는 저런 생각을 못 한 것일까. 초조함과 불안감에 휩싸여 덩어리진 감정 하나가 내 마음을 무겁게 누른다. 여러 감정이 뒤섞여 정신을 괴롭게 만든다. 언제쯤 나는 이런 감정에 초연해질 수 있는 걸까. 사라지기는 하는 걸까. 언제쯤이면 어른스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걸까.


사라지는 것들 – 어린시절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린 시절이 나와 이별해야 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나의 영원한 영웅일 거라 믿었던 아이언맨도 죽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쭈욱 함께했던 그가 내가 결혼하자, 세상을 구하며 영원히 잠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젊은 영웅들이 등장한다. 그렇게 슬픈 장면으로 연출되지 않았지만, 그의 죽음이 나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문득 생활하다가 그 장면이 떠오르면 마음 한구석이 시렸다. 언젠가 또 다른 영웅이 나의 마음에 들어와 또 내가 나이를 먹으면 그 영웅이 죽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 아이언맨이 처음 등장했던 영화를 보았다. 젊었던 그의 모습을 보니 그때의 내가 무엇을 했는지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그때 친했던 친구, 남자친구, 입고 있었던 옷, 자주 신었던 신발 뭐하나 나에게 남아있던 것이 없었다. 다 사라졌다. 일기장을 펴보니 그때의 철없던 나의 기록들이 남아있었다. ‘오늘 아빠가 용돈을 줘서 기뻤다. 수업이 듣기 싫어 수업을 빼먹었다.’ 작은 것에 기뻐했고, 사소한 것에 울었던 내가 적혀있었다. 지금은 무덤덤한 내가 남아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은 조금씩 단단해진다. 그 단단해진 마음은 감정을 무던하게 만든다. 작은 것에 열광하고 즐거워했던 마음이 사라진다. 그리고 잔잔한 평범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조금은 철없더라도, 무언가에 열광하고 즐거운 감정을 느낄 날이 올까.


사라지는 것들 – 하나시

할아버지는 첫 손주인 나를 제일 예뻐했다. 다른 손주들이 무슨 잘못을 하면 호랑이처럼 무섭게 돌변했지만, 나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웃음 가득하셨다. 사탕이나 먹을 것도 나만 몰래 챙겨주셨다. 가끔 경운기에 나만 태우고 아이스크림을 ‘하드’라 부르며 “우리 따미 하드 사줄까”라며 슈퍼에 데려가 주시곤 했다. 까끌까끌한 수염을 내 볼에 비비며 나의 괴로운 소리에 더 즐거워하시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자신을 ‘하나시’라 부르며 “따미야 하나시 해봐”라고 어릴 적부터 교육했다. 나는 그래서 할아버지를 하나시라고 불렀다. 새총을 만들어달라고 하면 새총을 만들어주셨고, 나무에 감을 따달라면 감을 따주셨던 하나시였다. 나의 첫 이별은 하나시와의 이별이었다. 내가 커가면서 자주 가지 못했고 하나시는 내가 20살일 때 그렇게 나의 곁을 떠났다. 시골에 더 이상 하나시가 없었다. 내가 항상 느꼈던 온기가 사라졌다. 당연하게 느꼈던 온기가,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꿈에 한번을 안 나타냈다. 내가 산소에 가지 않아서, 내가 바쁘단 핑계로 하나시를 찾지 않아서 내가 미운 건지 꿈에 한번을 안 나타냈다. 그랬는데, 어느 너무 힘든 날. 내가 너무 힘들어서 약도 먹고 병원도 가고 엄마도 애타게 찾았는데 아무도 없었던 그런 날. 꿈에 하나시가 나타났다. “고생했다. 다 괜찮다”라고 한마디 하며 어릴 때 그때처럼 그 까끌까끌한 수염으로 나의 볼에 비비며 쓰다듬어주었다. 나는 어린애가 되어 하나기 품에서 엉엉 울었다. 그게 벌써 몇 년 전이다. 하나시는 그렇게 또 내 곁에서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들 – 엄마

나는 엄마가 없다. 엄마는 멀쩡히 살아있지만, 나에게는 없는 사람이다. 어느 날은 엄마가 며칠간 연락이 안 되었다. 동생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 혼자 사는 엄마가 걱정된다고 했다. 엄마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엄마의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나는 그때 입원 중이었기에 내가 직접 찾을 수 없었다. 엄마는 밤이 되면 어둠에 삼켜지는 그런 두메에 살고 있었기에 걱정이 더 커졌다. 나는 결국 주변 파출소에 전화해 엄마의 신변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엄마는 집에서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비몽사몽 한 채로 잠들어 있었다. 경찰분들은 엄마의 신변을 확인해주고 돌아가셨다. 다음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동네 창피하니깐 이런 짓 좀 하지 마” 며칠 만에 연락이 된 엄마의 한마디였다. 엄마는 내가 입원 중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와 동생이 걱정하느라 수백 통 가까이 된 카톡을 알고 있었다. 단지 엄마는 주변 사람들 시선이 걱정되어 나의 행동에 비난했다. 나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엄마의 비난은 계속되었다. 나의 행동이 정말 잘못된 건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때 나의 엄마를 향했던 애틋한 모든 감정이 사라졌다. 엄마를 보고 싶었던 마음, 그래도 엄마니깐 끊지 못했던 미련도, 모든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엇을 위해 잡고 있던 감정이었는지 허무해졌다. 순식간에 그리움이 미움으로 바뀌었다. 애초에 있지 않았던 감정인처럼 그리움이 사라졌다. 나는 그렇게 숨죽여 울며 엄마와 이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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