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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그렇게 폭력적인 줄 몰랐어!(2)

그대 앞에서 약한 남자이고 싶진 않았다오

by 문학중년 마크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공격적이고 폭력성을 가지고 있다고?

원시시대부터 남성이 사냥을 하고 다른 부족과 전쟁을 하고 짝을 찾기 위해 무력으로 여성을 제압하였던 역사적 사실 속에 그 근원이 있다고?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남자의 한 사람으로 살아오면서 물리적인 힘이 지배하는 폭력의 미학이 이 세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개인적으로는 코흘리개 학창 시절을 제외하고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누군가와 멱살잡이는커녕 말싸움조차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혈기왕성한 20대 때에는 술에 취해서 친구들과 함께 어깨에 힘주고 다른 무리들과 옥신각신 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그때도 나름 성인이었던지라 어리석게 주먹질 같은 걸 해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점점 더 약해지는 몸과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길거리에서 새파란 어린 녀석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어도 그냥 못 본 척하고 지나가는 전형적인 한국의 꼰대가 되어버렸다.

운전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운전하다 보면 정말 욕 나오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대부분 빵빵 한 두 번하고 혼자 웅얼웅얼 욕을 날리고 만다. 가끔 길에서 차 세우고 멱살잡이 하는 사람들을 보면 혀를 끌끌 차며 “으이그, 저래 봐야 뭐 좋을 거 있다고 저러고들 있어” 하면서도 지나칠 때까지 구경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아내와 딸이 타고 있는데 갑자기 튀어나오다니. 아내는 급정거에 몸을 기울이며 “악” 소리를 냈고 조금만 브레이크가 늦었어도 그 차를 박을 뻔했다.

순간 나로서도 생소한 분노가 혈류를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상대방이 불쑥 나타나 평화로운 나의 가정을 파괴한 파렴치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미 그 사람은 죽일 놈이 되어버렸고,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본능적으로 클락션을 누르기 시작했다.

가끔 클락션을 한 삼십 초 정도 울리면서 성질을 부리는 미친(?) 인간들을 길에서 보고는 저인 간은 정신병자야 라고 굳게 믿었었는데, 오묘한 이 클락션의 소음은 그 당시 나의 분노를 멀리멀리 전달해주는 메신저 같은 역할을 해 주었고 그 안에는 멈출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차를 몰고 그 차 옆에 바짝 붙어서 창문을 내렸다. 클락션을 멈추고 창문을 내리는 그 순간에 비로소 약간의 이성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스포츠머리를 하고 팔뚝에 용 그림이라도 그려져 있는 사람이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0.00001초 정도 스쳐갔다. 분명히 개념 없는 김여사일 거야. 여자라면 뭐 남자인 내가 좀 참아야지 어쩌겠어하는 생각도 비슷한 정도로 짧게 떠올랐다.

상대편 차의 창문도 내려왔다. 운전자 혼자 타고 있었고 약간은 젊어 보이는 남자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학 문제를 바라보는 것처럼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일단 스포츠머리는 아니니까 다행이야. 클락션을 저리 눌러댔으니 내가 열 받은 건 알고 있을 테고 이 상황에서 점잖게 “아니, 그렇게 갑자기 나오면 어떡합니까? 아내와 딸이 무척 놀라지 않았겠습니까?”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암.


나는 아주 무난하고 널리 애용되는 운전 중 싸움의 첫 번째 멘트를 주저 없이 날렸다. 그것은 바로 “이거 봐요.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 상대가 잘못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면서 동시에 내가 피해를 봤다는 것을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국민 멘트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주 이상하게도 내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갔다.

“야 이 새끼야, 운전 똑바로 못해?”

앗! 이건 뭐지? 욕을 하려던 건 아닌데.... 아마 그전에 너무 흥분해서 달려갔던 그 관성이 남아있어서 나도 모르게 ‘새끼’란 말이 나왔던 것 같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나온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 나는 한층 더 인상을 쓰면서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노려봤다.


“뭐 이 개 XX야. 왜 욕을 하고 지랄이야.”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저런 새파란 녀석이 욕 한번 먹었다고 여섯 배는 심한 “개”라는 접두사까지 붙여서 바로 되돌려 욕을 시전 하다니. 순간 잠시 되찾았던 이성은 다시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고 분노의 쓰나미가 밀려왔다.


그다음부터는 뭐라고 했는지 잘 기억은 안 난다. 분명히 상대방보다 좀 더 심한 욕을 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으로 나름 다양하게 여러 가지 욕을 해대었던 것 같다. 아는 욕이야 많지만 막상 상대방에게 그걸 퍼붓는다는 것은 실전 경험이 부족한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했던 욕을 계속 반복하는 것은 왠지 세련되지 못하고 서툴러 보일 것이란 생각에 나름 정제되고 다양한 욕설을 골라서 하느라고 했던 것 같다.

뭐 운전 중에 벌어지는 말싸움이 대부분 그렇지만 어느 한쪽이 차에서 내려서 상대방을 끌어내지 않는 한 거의 그러다 말게 된다. 상대방도 수차례 응답을 하다가 입이 아팠는지 방향을 틀어서 휙 하고 가버리고 말았다. 나도 계속되는 고성에 피곤함을 느끼던 차라 더 이상 그 차를 쫓지 않았다. 다행이다.


비로소 차 안을 둘러보니 아내와 서영이의 표정이 싸하다. 놀란 건지 무서운 건지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들을 하고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다.


“자식이 말이야. 튀어나왔으면 미안하다고 비상등이라도 켜던지 해야지 곧 죽어도 잘못한 게 없다고 바락바락 덤비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


아무 반응이 없다.

싸한 침묵이 약 5초 정도 흐른 후 아내가 마지못해 입을 연다.

“그래도 좀 참지. 길에서 그렇게 소리 지르면서 싸우고 싶어? 요즘 세상에 이상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당신 그러다가 큰 싸움 나면 어쩌려고 그래?”

예상했던, 그리고 기다렸던 질문이다.

“아니, 참으려고 했는데 당신이 놀라서 비명 지르는 거 보니까 갑자기 열이 받아서 참을 수가 없더라고. 자식이 감히 우리 마누라를 놀라게 해? 흐흐. ”

마무리의 너털웃음은 내가 생각해도 어색했다. 그 어색함은 그 후에도 귀가시간까지 우리와 함께 했고, 덕분에 그날의 기억은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재수 없던 날’로 남아 있을 것이다.


식구들을 옆에 태우고 운전하다가 길에서 싸운 아빠들의 솔직한 마음을 묻는다면?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누구앞에서도 꿀리고 싶지 않아. 물론 욕설이나 폭력은 나쁜 것이지만 설령 그보다 더한 것을 해서라도 남자는 가족들을 보호해야 해. 그게 남자의 숙명이고 가장의 의무이지.”

라고 멋지게 말할 거다. 이건 진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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