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는다는 것의 효용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다른 이들보다 좀 더 많이 가지고 있는 편이다.
지금도 그 시절 친구들은
그 당시 어떤 사실에 대해 논쟁이 있게 되면 어김없이 나에게 판단을 요청하곤 한다.
이를테면 초등학교 때 소풍을 어디로 갔었는지나
서울에서 전학 왔던 예쁜 여학생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등등.
그럴 때마다 거의 정확한 기억을 가지고 답변을 할 수 있었던 나를 보고
친구들은 '별 걸 다 기억하는 놈'이라며 신기하게 여겼다.
하긴 본인들은 기억 못 하는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 성함이나 자신들의 반, 심지어는 번호까지도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기억을 잘하는 사람인 줄 알았고
과거의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기억을 잘하는 사람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기에
나 또한 내가 머리가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
과연 그런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무엇 무엇이 좋고 나쁘다는 판단은 그 기준이 있어야 의미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근 몇 년 사이에는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무척 많이 생겼다.
티브이에 등장한 익숙한 얼굴의 연예인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거나
분명 예전엔 알았던 어떤 지명이나 물건 이름 등도 기억이 나지 않아 눈만 꿈벅거리는 경우가 잦아졌다.
한 번은 집 앞에서 현관문 비밀번호가 갑자기 생각나지 않아서 결국 아내에게 전화해서 물어본 적도 있었다.
심각하다.
나는 머리가 나빠진 것일까.
이러다 치매노인이 되어 버리는 걸까.
다행히도(?)
이런 현상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중년에 접어든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겪는다고 하는 것 같다.
아내와 함께 티브이를 보다가 낯익은 영화배우가 나오면
'저 사람 이름 뭐지?'
'쟤, 걔잖아. 거기.. 예전에 그 영화.. 거기 나온 사람'
'글치, 그 영화 같이 봤잖아. 여자 주인공은 그.. 걔.. 였고 '
남주를 기억하기 위해 소환한 영화와 여주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계속 '거기 저기 걔 그때' 등등을 반복하게 되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지시대명사로 칭하는 대상들을 우리 둘은 다 알아듣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그 장면들이 떠오르고 있는데
다만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뿐이었다. :)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쇠퇴하는 이유에 대해
나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생각해 보건대
어린 시절의 우리는 매일 벌어지는 경험들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지식과 행동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상황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등을 깨달으며 성장한다.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이 또한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기전이다.
동네에서 무서운 형을 보면 다음번에는 인사를 잘해야 얻어맞지 않았고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일부러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옷차림이나 가지고 다녔던 가방모양 같은 것들을 기억하게 된다.
종족번영을 위한 유전학적 작용까지 멀리 나가지는 않는다고 해도
그 모든 기억들은 '앞으로'의 인생을 위해 필요한 정보와 데이터들이었고
우리는 그 기억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장씩 삶의 일기를 써왔다.
그래서 보통은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잘 지워지지 않는 것 같다.
반면
앞의 이유에 빗대어 보자면
중년 이후가 되면서 근래의 기억이 감퇴하는 것은
과거의 데이터를 가지고 새로운 상황에 대처할만한 일의 빈도가 줄어든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하면 어느 정도 인생을 살고 나니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이벤트를 접할 기회가 어렸을 때에 비해 현저히 적어졌고
뇌세포를 자극할만한 신선한 사건의 발생이 줄어들고
과거의 플랫한 일상들 속의 데이터들은 이미 쌓일 대로 쌓여있지만
이제는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저장의 가치가 없어지게 되고
그래서 현명한 뇌는
슬그머니 그것들을 덮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살아온 수많은 날들과 그 안에 담겨있을 수많은 기억들이
잊히지 않고 계속 머릿속에 남게 된다면
그 또한 고역일 것이다.
상처받은 말, 아팠던 일, 실패했던 경험들, 선택에 대한 후회 등등
없었으면 좋았을 여러 가지 일들 이겠지만
인생에서 반드시 벌어지는 일들이기도 하다.
그런 모든 것들이 망각되지 않고 평생 또렷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면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그래서인지 돌이켜보면
아프고 힘들었던 과거의 일들은
나름의 미화와 자정을 거쳐서 아련하게 남게 되고
행복하고 가슴 벅찼던 순간들은
세월이 지나도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있게 되는 듯하다.
이렇게 보면
기억의 쇠퇴라는 것은
인생의 기승전결을 거쳐감에 있어 꼭 필요한 작용이 아닐까.
모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생을 살아왔지만
생을 마감할 때
슬프고 어두웠던 회한보다는
좋은 기억을 품고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 신의 배려가 아닐까
이제는
배우 이름쯤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자책하지 않으려 한다.
게다가 검색기능의 발전은 놀라워서
'영국 크리스마스 영화 여주인공' 같이 중얼거려도
바로 줄리아 로버츠의 사진이 나타나는 편리한 세상이 되었기에
궁금하면 물어보면 되니까.
그래,
사람이름 음식이름을 좔좔 읊는 것보다는
이렇게 글을 쓰고 기록을 통해 생각을 남기며
망각하고 싶지 않은 의미들을 하나 둘 건져내는 것으로
삶의 가치를 간직해 나갈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