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나는 새 다이어리를 장만했다.
녹색 표지에 금색 글씨가 멋들어지게 들어간 제품이다. 정확하게는 작년 12월에 구매했지만.
매년 새로운 다이어리를 사고, 많은 할 일과 이야기를 적겠노라는 다짐과 함께 평소보다 두 세 배는 정성스러운 글씨로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써넣는다.
그리고는 아주 뿌듯한 마음으로 가방에 넣는다.
언제라도 손에 닿을 수 있도록 하려면 가방 속 깊은 곳이 아닌 가장 바깥쪽에 두어야 한다.
늘 가지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다이어리는 너무 두껍거나 무겁지 않아야 한다.
기록할 펜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아직도 만년필을 동경하며 가끔 낙서 등을 끄적일 때 만년필을 집어 들기도 하지만
역시 신속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해서는 일반 펜이 가장 실용적이다.
볼펜은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최근 나의 최애 제품은 파이롯트사의 juice up 0.4미리이다. 아예 12가지 색상을 한 번에 마련하고 마음에 드는 색을 골라 사용한다.
나의 12월은 이렇게 다이어리를 고르는 과업이 포함되어 있다.
얼마나 오래된 습관인지는 잘 모르지만
꽤나 오래전부터 수첩, 다이어리, 필기도구 같은 문구들에 눈길이 갔고
마트나 서점에 가도 메인 제품보다는 외려 팬시나 문구류 코너를 어슬렁거리는 시간이 더 길었던 듯하다.
그래서... 나는 다이어리를 잘 기록하는 습관을 지닌 사람이냐고?
아쉽지만 전혀 그렇지 못하다.
다이어리를 고르고 구매하고 들여다보고 이름 쓰고 빨리 사용할 다음 해를 기다리고..
이것이 12월의 즐거운 연례행사라면
그 직전에는 작년에 산 다이어리의 빈 공간들을 보면서 이번에도 채우지 못한 지난 일 년을 후회하는 우울한 감정을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된다.
나이를 먹어가는 만큼 누차 반복되어 이제는 절반 이상이 백지로 남은 다이어리의 모습이 제법 익숙할 지경이긴 하지만
1년 전 흐뭇한 마음으로 손에 들고 바라봤던 대상이 사용기한이 다 되어 가는데 온통 빈 공간 투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미안하고 부끄럽고 화도 나고 그런 심정이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다이어리를 산다.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리 사는 것을 좋아한다.
새 다이어리를 들춰보고 만져보고 고르는 작업 자체에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기도 하려니와 한편으로는 완전한 백지상태로 펼쳐진 다이어리 속 1년이라는 시간은 마치 빈 지갑 속에 누군가 새 지폐로 용돈을 넉넉히 담아 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두가 똑같이 한 살이라는 나이를 먹고
누구나 새해가 되면 새로운 1년을 부여받지만
왠지 이런 당연한 자연의 규칙에 보증이라도 세우려는 듯 다이어리를 사게 된다.
그리고 또 봄이 오고 여름과 가을을 익숙하게 맞이해 나가면서
다이어리가 보증해 준 1년이라는 약속은 서서히 희미해진다.
며칠에서 몇 주, 몇 달이 지난 후에
그간 삶의 흔적을 남기지 않아도
별 일없이 숨 쉬고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다이어리의 빈 공간을 마주하기 싫어서
그를 외면하고, 덮고
다시금 새로운 다이어리를 살 날을 기다리게 된다.
다이어리를 잘 써야겠다는 목적의식 같은 건 없다.
다만 과거의 시간이 비워진 채로 오늘을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줄이고 싶을 따름이다.
계좌 속 돈이 어떻게 해서 매번 비게 되는 건지 늘 이해가 되지 않지만
통장정리를 해보면 한 치의 오류가 없듯이
마찬가지로
한 주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또 한 살은 언제 먹은 건지 늘 의아하지만
막상 다이어리를 들춰보면 내게 남들보다 덜 주어진 시간은 그동안 단 1분도 없는 것이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의 나는
그동안 정리하지 않고 사용한 현금과 시간들의 결과만을 소유하고 있을 뿐
생략된 과정은 없다.
아무튼 그리하여
올해도 새 다이어리가 내 곁에 놓여있다.
답동 성당 옆에 있는 가톨릭 서점에서 구입한 것이라
이 녀석의 한 주간 지면 할당은 무척 편향적이다.
성서 구절이 한 면
다른 한 면은 7개로 나뉜 아주 조그마한 칸으로 일주일이 지나간다.
중요한 일이나 일정의 제목만 적기에도 모자란 넓이다.
마음에 든다.
우리가 사는 삶의 장면들은 굳이 긴 설명이 없어도
비워져 있지 않다면 충분할 테니.
오히려 기록할 일이 너무 많은 나날이라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피곤할 것이 분명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