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학중년 마크 Jan 23. 2024

새 다이어리를 바라보며

새해가 되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나는 새 다이어리를 장만했다. 

녹색 표지에 금색 글씨가 멋들어지게 들어간 제품이다. 정확하게는 작년 12월에 구매했지만.

매년 새로운 다이어리를 사고, 많은 할 일과 이야기를 적겠노라는 다짐과 함께 평소보다 두 세 배는 정성스러운 글씨로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를 써넣는다. 

그리고는 아주 뿌듯한 마음으로 가방에 넣는다. 

언제라도 손에 닿을 수 있도록 하려면 가방 속 깊은 곳이 아닌 가장 바깥쪽에 두어야 한다.

늘 가지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다이어리는 너무 두껍거나 무겁지 않아야 한다. 

기록할 펜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아직도 만년필을 동경하며 가끔 낙서 등을 끄적일 때 만년필을 집어 들기도 하지만 

역시 신속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해서는 일반 펜이 가장 실용적이다. 

볼펜은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최근 나의 최애 제품은 파이롯트사의 juice up 0.4미리이다. 아예 12가지 색상을 한 번에 마련하고 마음에 드는 색을 골라 사용한다. 


나의 12월은 이렇게 다이어리를 고르는 과업이 포함되어 있다. 

얼마나 오래된 습관인지는 잘 모르지만

꽤나 오래전부터 수첩, 다이어리, 필기도구 같은 문구들에 눈길이 갔고

마트나 서점에 가도 메인 제품보다는 외려 팬시나 문구류 코너를 어슬렁거리는 시간이 더 길었던 듯하다. 


그래서... 나는 다이어리를 잘 기록하는 습관을 지닌 사람이냐고?

아쉽지만 전혀 그렇지 못하다. 


다이어리를 고르고 구매하고 들여다보고 이름 쓰고 빨리 사용할 다음 해를 기다리고..

이것이 12월의 즐거운 연례행사라면

그 직전에는 작년에 산 다이어리의 빈 공간들을 보면서 이번에도 채우지 못한 지난 일 년을 후회하는 우울한 감정을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된다.

나이를 먹어가는 만큼 누차 반복되어 이제는 절반 이상이 백지로 남은 다이어리의 모습이 제법 익숙할 지경이긴 하지만

1년 전 흐뭇한 마음으로 손에 들고 바라봤던 대상이 사용기한이 되어 가는데 온통 공간 투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미안하고 부끄럽고 화도 나고 그런 심정이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다이어리를 산다. 




많은 사람들이 다이어리 사는 것을 좋아한다. 

새 다이어리를 들춰보고 만져보고 고르는 작업 자체에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기도 하려니와 한편으로는 완전한 백지상태로 펼쳐진 다이어리 속 1년이라는 시간은 마치 빈 지갑 속에 누군가 새 지폐로 용돈을 넉넉히 담아 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두가 똑같이 한 살이라는 나이를 먹고 

누구나 새해가 되면 새로운 1년을 부여받지만

왠지 이런 당연한 자연의 규칙에 보증이라도 세우려는 듯 다이어리를 사게 된다. 

그리고 또 봄이 오고 여름과 가을을 익숙하게 맞이해 나가면서

다이어리가 보증해 준 1년이라는 약속은 서서히 희미해진다.

며칠에서 몇 주, 몇 달이 지난 후에 

그간 삶의 흔적을 남기지 않아도 

별 일없이 숨 쉬고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다이어리의 빈 공간을 마주하기 싫어서

그를 외면하고, 덮고

다시금 새로운 다이어리를 살 날을 기다리게 된다.      


다이어리를 잘 써야겠다는 목적의식  같은 건 없다. 

다만 과거의 시간이 비워진 채로 오늘을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줄이고 싶을 따름이다. 

계좌 속 돈이 어떻게 해서 매번 비게 되는 건지 늘 이해가 되지 않지만

통장정리를 해보면 한 치의 오류가 없듯이 

마찬가지로

한 주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또 한 살은 언제 먹은 건지 늘 의아하지만

막상 다이어리를 들춰보면 내게 남들보다 덜 주어진 시간은 그동안 단 1분도 없는 것이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의 나는

그동안 정리하지 않고 사용한 현금과 시간들의 결과만을 소유하고 있을 뿐 

생략된 과정은 없다. 


아무튼 그리하여

올해도 새 다이어리가 내 곁에 놓여있다. 

답동 성당 옆에 있는 가톨릭 서점에서 구입한 것이라

이 녀석의 한 주간 지면 할당은 무척 편향적이다.

성서 구절이 한 면

다른 한 면은 7개로 나뉜 아주 조그마한 칸으로 일주일이 지나간다. 

중요한 일이나 일정의 제목만 적기에도 모자란 넓이다.

마음에 든다.

우리가 사는 삶의 장면들은 굳이 긴 설명이 없어도

비워져 있지 않다면 충분할 테니.

오히려 기록할 일이 너무 많은 나날이라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피곤할 것이 분명하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일 년에 단 한 번, 일생에 단 한 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