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
따뜻하고 향긋한 양파 차 덕분에 몸의 긴장은 나른하게 풀렸지만
이상하게도 니아는 잠들지 못했다.
지난 달에 새로 구매한 더블 싱글 사이즈의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잠들기 위해 가만히 있었지만 졸음이 찾아오지 않았다.
어딘가 불안함으로 인해 잠들지 못하는 건 아니였다.
오히려 몸은 이상할 정도로 편안했고, 머리는 또렸했지만 피곤하다는 감각만
사라진 듯 니아의 몸에서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불 꺼진 방 안은 어두웠고 화장실에서 돌아가는 환풍기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벽 너머 누군가 변기 물을 내리는 소리만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왔다.
주방에 있는 작은 냉장고 모터가 멈췄다 켜질 때 마다 공기가 흔들렸다.
울타리를 뛰어 넘는 양을 세어봐도 잠에 들지 못하자 니아는 눈을 뜨고 어두운 천장을 멍하니 쳐다봤다.
'자야하는데...자야하는데..내일도 바쁠텐데'
니아는 오른쪽, 왼쪽으로 굴러 자세를 바꿔가며 뒤척였지만 잠이 오지 않자
침대 머리 맡에 충전 중 인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핸드폰 화면을 켰지만 시간이 보이지 않았고
어떤 알람도, 연락도 없었다.
하지만 니아는 문득 곧 일어나야 한다고 강력한 확신이 들었다.
니아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벗어났다.
발바닥이 바닥이 닿는 감각이 또렷해서 마치
지난 날 오래 서 있었던 주방 바닥을 처음 밟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시선을 옮기니 방 한 가운데에 놓인 노란 테이블에는 하얗고 약간 작게 변한 양파 아저씨가 그대로 있었다.
마치 잠든 것 처럼 눈을 감고 고요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보자 니아는 그를 보자마자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혹여나 깨울 까 조용히 일어나 주방으로 가 컵을 하나 더 꺼냈다. 어제 쓰고 설거지를 하지 않아 그대로 있는 회색 도자기 잔 옆에 같은 모양의 잔을 하나 더 내려놓았다.
어제 마셨던 물을 살짝 데운 후 새로운 잔에 조금 따라 마셨다.
어제만큼 양파의 은은한 향이 강하지 않았지만 연하게 입 안에 피어오로는 향에
니아는 기분이 좋아졌다.
니아는 고개를 돌려 침대 오른쪽에 있는 베란다를 통해 바깥 풍경을 잠시 봤다.
아직 완전히 해는 뜨지 않았지만 세상은 깨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고, 한적한 도로에
차는 다니지 않았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부지런한 작은 새 울음 소리에 니아는 이제 나가야 한다는
강한 확신이 들어 마시던 차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채비를 시작했다.
주방 왼쪽에 있는 흰색 타일 벽면과 적갈색 바닥으로 꾸며져 있는 작은 화장실로 들어가
찬 물로 세안을 한 뒤 양치를 하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거실로 돌아와 A4 사이즈의 검정 노트와 작은 요리 책 한 권이 든 흰색 에코백을 챙기고 유니폼과
앞치마와 주황 가죽으로 된 칼 가방을 메고 현관문 앞에 섰다.
신발을 신고 문 앞에 서 차가운 손잡이를 잡았지만 니아는 열지 못한 채 잠시 멈췄다.
평소라면 짧게 신세 한탄을 하거나 작은 욕을 뱉으며 문을 박차고
진작에 나갔을 타이밍이었지만 손을 놓지 않은 채 잠시 서 있었다.
니아는 짐 들을 왼쪽 어깨에 두른 채 잠시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심장이 빨리지지도 않고, 머리가 어지럽지도 않았다.
평소와 달리 일을 하러 가기 싫다는 거부감도 들지 않았으며, 신세 한탄과 욕도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지나치게 고요하고 평온하게 멈춘 상태 였다.
그 때 등 뒤에서 양파 아저씨의 낮고 평온한 목소리가 나지막히 들려왔다.
'오늘은 퇴근하고 먹을 거 생각해봐. 결국은 네가 먼저다'
니아는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지만 대답 하지 않은채 작은 미소를 머금고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타고 내려가 주차되어 있는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자 힘찬 엔진 소리가 들려왔고 출발하기 전 니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참나..이제 시작인데 무슨 벌써 저녁을 생각하래..아주 잘났어 진짜'
투덜거리는 말과 달리 일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울상이거나 짜증이 담긴 표정이 아닌
작고 평온한 미소를 머금고 니아는 레스토랑 '크라이세'를 향해 운전을 시작했다.
아직 세상이 깨어나지 않은 황혼의 새벽 시간.
한적하고 고요한 도로 위를 운전하자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은 혼자된 기분과
이 도로를 온전히 지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 니아는 괜스레 기분이 더 좋아져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큰 도로를 지나 샛길로 빠져 자갈이 간간히 밟히고 옆으로는 바다와 논이 보이는
시골 길을 지나오니 어느 덧 레스토랑이 위치한 리조트 단지에 도착했다.
평소라면 출근한 직원들의 차량과 임주상 대표의 차가 주차되어 있던
레스토랑이 자리 잡은 하얀 3층 건물 앞 자갈 밭에는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는지
차가 한 대도 주차 되어 있지 않았고 니아는 출근 길에 느낀 기분을 온전히 만긱하고자
평소 임주상 대표가 주차하던 구석 자리에 주차를 했다.
'전용 자리는 아니잖아? 먼저 온 사람이 임자지 뭐 오늘은 다른데 주차하세요 대표니임'
후진으로 주차를 하고 니아는 차에서 내리는 순간 등 뒤에서 얇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많이 컸다 니아야? 임주상이 자리에 주차를 다하고 말야. 간뎅이가 부었네 부었어'
짐을 챙기던 니아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니 리조트를 전반적으로 관리하는 조인성 실장이었다.
매번 염색을 하는 건지 남자 치고는 작은 키에 약간 붉은 끼를 띄는 눈썹 위로 내려와 있는
짧은 머리에 또렷한 이목구비에 살짝 삐져나오는 오른 쪽 송곳니가 마치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실사화 된 듯한 외모를 지녔으며 오른 쪽 귀에는 늘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허리에는 작은 검정색 힙색을 차고 왜 인지 모르겠지만 왼 쪽 팔에만 흰 토시를 끼고
갈색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니아의 등 뒤로 슬며시 나타났다.
'아 깜짝이야! 실장님이 이 시간에는 무슨 일로 출근하셨데요?'
'이거 봐라? 내 질문에 대답도 안하고 질문을 쏴? 이 자식이 숨지고 싶어? 너야 말로
이 시간에 왠일이냐? 원래 이때 출근 안하잖아. 왜 임주상이가 뭐 시키더나'
'에이 그럴리가요 그냥 눈 떠진 김에 출근했어요. 실장님은요?'
'말도 마라 어제 또 진상이 진상이..어휴 진짜 내가 늙는다 늙어'
'어 이미 늙으신 거 아니에요?'
'니가 오늘 진짜 뒤지고 싶구나 어? 됐고 이따 내가 전화하면 오늘 밥 좀 해주라
간만에 리조오~토가 먹고싶네'
'넵 직원 할인으로 특별히 20만원 입니다 아시죠? 늘 먹던 거 준비해드릴까요?'
'그래~ 나 간다'
니아에게 할 말을 모두 마친 조인성 실장은 뒤를 돌아 슬리퍼를 질질 끌며
리조트 넘어로 사라졌다.
'참 나 혼자 출근해서 심심하셨나 보네 ㅋㅋㅋ 아 왜 저래 정말'
조인성 실장은 리조트와 레스토랑을 통틀어 유일하게 니아가 믿고 좋아하는 인물이다.
'애는 잘 있나 몰라'
문득 레스토랑 입사 첫 날이 떠오른 니아였다.
입사 첫 날, 레스토랑에 아직 식재료와 기물들이 들어오지 않아 할 수 있는게 없었던 터라
임주상 대표와 임룡태 팀장에게 리조트 이곳 저곳에 불려 다니며 지리를 익히고
리조트 용 수건 접기, 빨래감 나르기, 수영장 청소, 창고 정리 등 많은 잡무를 했다.
'와...생각보다 리조트 운영이 보통 일이 아니구나 이거..'
평소에 이렇게 까지 무거운 짐들을 나르고 옮겨본 적 이 없던 터라 니아는 굉장히
힘들어했고, 다음 지시가 있기 전 잠시 1층 카페에 있는 연 갈색의 나무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어 어 지금 노는거야? 다 말한다?'
쉬고 있던 니아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조인성 실장의 장난끼 많은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니아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니 그 아니에요 잠깐 다른 일 시키실 때 까지 쉬고 있었어요'
'알아 알아 ㅋㅋㅋ앉아 앉아 난 그런 거 싫어 쟤들이 막 못살게 굴지?'
니아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크게 웃으며 이야기 했다.
'오늘 처음이라 정신 없지? 아마 더 정신 없을 거야. 음 어쩌면 여기 온 걸 후회하게 될 지도?'
조인성 실장의 의미심장 한 말에 니아는 의문이 들어 질문을 하려 했으나 곧바로 따라 나온 말에 말문이 막혔다.
'됐어 가자. 임주상이랑 룡태는 퇴근했어 니 데려다 주래 빨랑 와. 안 그럼 먼저 간다'
니아는 쥐도 새도 모르게 말도 없이 퇴근해버린 임주상 대표와 임룡태 팀장에게 작은 배신감이 들었지만 굳이 티 내지 않고 조용히 조인성 실장을 따라갔다.
1층 카페의 유리문을 열고 나와 자갈 밭 중간에 주차되어 있는 조인성 실장의 흰색 미국산 SUV에 따라 올라탔다.
'밥은 먹어야지 그제? 우리 룡태씨가 첫 날이라고 밥 잘 맥이라고 하드라~ 지가 하면 되지 꼭 나한테 맨날 그래. 뭐 가리는 건 없지? 있어도 말하지 마라 이럴 땐 가만히 있는거야'
혼잣말인지 니아에게 질문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끝내고 조인성 실장은 차에 시동을 걸고 왼손으로는 핸들을 잡고 운전을 하며 오른 손으로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전화를 걸었다.
'어 나 지금 퇴근하는데 신입 하나 데려갈거거든? 어 얘도 같이 밥 맥이고 술 한잔 맥일려고 어 어~'
니아는 예정에 없던 저녁 일정과 술 일정도 생겨 당황했지만 그래도 이게 회사 생활인가 싶고 자신을 챙겨주는 실장의 모습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저희 술도 먹어요? 근데 누구한테 전화하신 거에요?'
'오 말 할 줄 아는구나? ㅋㅋ어 우리 이쁜 마누라.
우리 집 가서 밥 먹고 한 잔 해야지~'
'....에..네??! 갑자기요? 저 빈 손인데?? 아니 너무 갑작스러운데 에?'
'괜찮어 우리 먹고 살만 해 신입한테 뭐 안 바란다~
아 우리 애기가 하나 있거든? 들어갈 때 조용히 가야한다 알지?'
'에?? 아니 저 가도 되는거에요?? 애도 있으면 안되는거 아니에요? 저 더러운데'
'가시나가 왤캐 말이 많아 그냥 형님 따라와 임마
첫 날 부터 저것들한테 시달렸잖아 마'
그렇게 니아는 첫 날 이쁜 아이와 아내가 있는실장님의 집에 방문하게 되었고
어색해 하는 니아를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이들의 모습에 금방 의지하고 따르게 되었다.
얕은 미소를 머금고 1층 카페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여전히 삐걱 거리는 나무 계단을 타고
올라 레스토랑 '크라이세'에 도착하자 아무도 없는 평온한 고요함이 니아를 반겼다.
'역시 이 시간에 제일 좋아'
니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레스토랑 안 쪽 창고에 짐을 두고 옷을 갈아입고 앞치마를 매며
주방에 들어섰다.
'어 뭐야 깜짝이야!! 니아야 어...아니 벌써 왔어? 빨리 왔네?'
주방 오른쪽 구석에 위치한 1800짜리 싱크대에서 무언가를 세척하던 임현미 과장은
못 볼 사람을 본 듯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어 과장님 지금 여기에는 어쩐 일 이세요?'
니아도 깜짝 놀라 대답했다.
니아와 비슷한 키에 빨간 안경을 끼고 통통한 얼굴에 강렬한 빨간 립스틱 바르고 다니며 나이를 먹어 주름살이 늘어난 걸 가리고 싶은지 하얗게 분칠을 하고, 늘 공허한 눈빛과 구부정하게 목과 허리를 굽히고 있는 임현미 과장은 임주상 대표와 주로 움직이고 있으며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아들과 이제 중학교에 들어가는 딸을 두고 있다.
보통 평일 오전에는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던 터라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증이 생긴 니아는 슬며시 다가보니 넓은 싱크대에 거의 꽉 찰 만큼
커다란 문어가 들어가 있었다.
'에 뭐에요 이거?? 진짜 크다 이건 무슨 일로..?'
니아는 눈을 크게 뜨며 놀라 물어보자 임현미 과장은 작게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아니이 느그 대표님이 자기가 문어 사왔다고 맛 보고 싶다고 손질해오라잖아 참나 영감탱이 먹고 싶으면 지가 하면 되지..안글냐?'
임주상 대표의 이러한 사적인 부탁은 종종..아니 자주 있었던 일이라 니아는 이해가 되었다는 듯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그렇네 마침 잘 됐네 니아야 안 바쁘면이거 좀 손질 좀 해주라 응? 나 칼 할 줄 몰라서 그래 알지? 부탁 좀 할게 '
마침 타이밍이 맞았던 것 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놔두고 부탁할 셈이 었는지 임현미 과장은 당당하게 니아에게 뒷처리를 부탁했다.
'네..네?? 제가요? 저 할 줄 모르는데요? 다른 거 준비도 해야..'
'아유 참 유튜브 보고 하면 되잖아 응? 부탁 좀 할게 내가 바빠서'
임현미 과장은 니아의 대답을 마저 듣지도 않고 싱크대에 거대한 문어를 던져놓은 채 총총 걸음으로 서둘러서 주방을 빠져나갔다.
출근 길을 포함하여 불과 2분 전 까지 입사 후 처음으로 아침부터 굉장히 상쾌하고 기분이 좋았던
니아를 채 가만히 볼 수 없었는지 이 공간은 또 다시
니아를 수면 아래로 끌고 내려갔다.
'하아...나 오늘 진짜 기분 좋았는데....시발...'
니아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싱크대로 터벅터벅 걸어가 문어를 가만히 살펴보다
왼 손으로 다리를 움켜잡고 한번 뒤집어 보고는
주방에서 제일 큰 흰 플라스틱 도마를 펼치고 그 위에 있는 힘껏 던졌다.
미끌거리는 거대한 문어가 도마 위와 스테인레스 작업대 위에 점액질을 뭍혀 반짝이고 비릿한 문어의 냄새가 니아의 코 끝과 마음을 깊숙히 찔렀다.
'.....차 마시고 싶다'
니아는 울적해진 마음에 아침에 마신 미지근한 차가 떠올라 나지막히 중얼거리며
칼을 꺼내 손질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