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러코스터
롤러코스터를 탄 듯 자신을 심연으로 끌고 내려간
거대한 문어를 18인치 셰프 나이프로 손질하기 시작했다.
문어 다리를 손으로 잡자 문어 끈적거리는 문어 특유의 점액질이
손에 묻기 시작하며 도마에서 자꾸 미끄러졌고
동그랗고 거대한 빨판은 자꾸 들러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아.... 제발... 너까지 나한테 왜 그러니...'
문어조차 니아를 붙잡아한 층 더 깊이 끌고 내려가자
니아는 이미 생명을 다 한 문어에게 하소연 하 듯 중얼거렸다.
문어의 다리는 생각보다 미끄럽고 끈적거리고 무거웠다.
니아가 힘을 주어 자를 때마다 도마 위에서 점액질로 인해 질척한 소리가 났고,
칼 끝이 문어의 다리를 가르며 지나갈 때마다 미묘한 저항이 느껴졌다.
살아 있는 것도, 완전히 죽은 것 같지도 않은 경계에 있는 물성에
니아는 이상하게도 어딘가 익숙함을 느꼈다.
미끌거리는 점액을 소금으로 문질러 씻어내며 니아는
아무 생각도, 반응도 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이미 가라앉으며 피어난 감정과 생각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시발.. 시발... 시발... 진짜 더럽게 안 없어지네.. 너까지 왜 그래 진짜 좀'
생각을 하면 할수록 기분은 더욱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았고
기분이 가라앉으면 덩달아 작업하는 손이 거칠어졌고, 자꾸만 칼이 미끄러졌다.
'지금은 손만 쓰자... 생각하지 말고... 손만 쓰자.. 손..'
니아는 아침에 느꼈던 기분을 다시금 느끼기 위해 간절하고도 조용히 중얼거렸다.
주방의 불은 아직 모두 켜지지 않았고, 후드도 돌지 않아 냉장고에서 나오는
낮은 진동음과 수도관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만 공간을 채웠고
레스토랑 '크라이 세'는 아직 잠에서 덜 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문어 손질이 끝나자 어느새 시간은 훌쩍 흘러가 런치 서비스 시작까지 1시간만 남았다.
'아.. 안되는데? 1시간? 아 모자랄 것 같은데? 하... 씨 진짜'
니아는 시간을 확인하곤 조급한 마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매니저라는 사람은 언제 오는 거야 도대체? 왜 아직 안 오는 건데? 바쁜데 진짜 씨..'
니아는 문어를 대충 정리해 두곤 런치 서비스를 위해 손질하고 준비해야 할
식자재들을 꺼내며 조용히 불평하던 찰 나 임영미 매니저가 주방의 커튼을 열고 들어왔다.
'좋은 아침~ 니아야~'
니아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임영미 매니저는 한 손에는 1층 카페에서 뽑아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갈색 종이 빨대로 쪽쪽 빨며 인사했다.
'음? 이게 무슨 냄새야? 오늘 뭐 흘렸니? 어 저게 뭐야? 웬 문어? 니아야 이거 뭐야?'
평소와 다른 주방의 냄새에 인상을 찡그리며 주범을 찾던 임영미 매니저는
주방 구석에 위치한 회색 컨벡션 오븐 옆 대충 정리되어 있는 문어를 발견하곤 놀라며 물었다.
'이게 뭐야??? 웬 문어래?? 지인짜 크다 근데'
'아 이거 임주상 대표님이 사 온 문어인데 임현미 가장ㄴ....'
'아 그래? 다 한 거야? 연락드렸어? 제대로 정리해 놓자~'
성질이 급한 임영미 매니저는 니아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가벼운 잔소리를 하고
오른쪽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내 임주상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문어 손질 다 했는데 이거 어떻게 해둘까요~?'
'어 어 어 야 그거 네가 다 했냐? 스 고맙다 그거 어 어쩌지? 거기 넣어놔라
그리고 야 그거 조금 어? 나 맛 좀 보게 어? 좀 해서 여기 밑에 좀 가져와라'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네에~'
임영미 매니저는 마치 자신이 한 듯 임주상 대표에게 전화를 하여 이야기했다.
'니아야~ 이거 정리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조금은 잘라서 접시에 이쁘게 담아서 가져다 드려~'
순간 니아의 내면에서 무언가 뚝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며 가슴 한편이 시렸다.
어딘가 불편하게 아프기 시작하고 속은 울렁거렸다.
수렁에 빠진 듯 움직일 수 없는 기분에 니아는 임영미 매니저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고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문어를 마저 정리하여 냉장고에 넣기 위해
문어를 담아 둔 사각형의 스테인리스 트레이를 들고
냉장고 문을 열자 냉장고의 차가운 냉기가 니아의 얼굴을 스쳤고
그 순간 니아는 아주 짧게 멈췄다.
문어를 넣을 만한 공간을 찾기 위해 냉장고 안쪽을 살펴보던 니아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냉장고 안쪽 선반에 손질되고 정리되어 있는 식자재들에 붙어 있는
라벨들이 전부 같은 날짜를 가리키고 있었고, 심지어 오늘 날짜였다.
유통기한도, 식자재 입고일도, 손질한 날짜도, 심지어 이미 사용한 재료의
라벨까지 오늘 날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 니아는 분명 임현미 과장이 던지듯 맡기고 간 문어를 손질하느라
아직 재료 손질도 하지 못했고, 식자재 정리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니아는 이상함에 눈을 감고 머리를 가볍게 양 옆으로 저었다.
'아 씨.. 왜 이래.. 어제부터 뭔가 이상하네.. 하.. 멀쩡한 게 없어..'
어제부터 계속되는 이상한 현상에 니아는 속으로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곧바로 다시 눈을 떠 냉장고를 봤을 땐 처음부터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정상적인 날짜로 돌아와 있었다.
'... 스트레스를 받다 받다 드디어 내가 미쳐버렸구나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하..'
니아는 스트레스를 받다 정신이 나갔다고 작은 확신을 하며
문어를 담아둔 트레이를 냉장고 안쪽 두 번째 칸에 들어있는
샐러드용 야채 옆으로 슬며시 밀어 넣었다.
트레이를 밀어 넣고 가지런히 각을 맞춘 후 문을 닫으려는 순간
니아는 손을 잠시 멈췄다.
'오늘 런치... 여섯 테이블'
누가 말해준 것도 아니고, 아직 예약표 확인도 못했지만
니아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예약을 점검했다.
냉장고 안쪽에서 아주 약한 소리가 '툭'하고 들려왔다.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라기보다는
마치 안에서 누군가 냉장고 정리를 마무리하는 소리 같았다.
하지만 니아는 굳이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제부터 한 번씩 나타나는 이런 순간마다 확인하면 더 피곤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애써 무시하고 넘어갔다.
대부분의 문어를 정리하고 따로 조금 빼둔 문어 다리를 작게 잘라
접시에 꽃 모양처럼 돌려가며 플레이팅하고 나무젓가락을 꺼내
임주상 대표가 있는 1층 카페 주방 안쪽에 따로 마련된 작은 사무실로
발을 질질 끌며 향하던 중 니아는 주방 입구 커튼을 열고선 발걸음을 멈췄다.
분명 방금까지 그 자리에 없던 주황색 빛깔을 띄는 나무 의자가
주방 입구에 설치된 커튼 바로 앞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누군가 앉아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앉아 있을 만한 위치도 아니었지만
그냥 그곳에 처음부터 있었다는 듯 존재하고 있었다.
'시발 진짜 오늘따라 나한테 왜 이래?? 이젠 의자야? 어??'
니아는 순간 욱하는 분노가 끓어 올라 의자를 째려보다
굳이 치우지도 않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옆으로 피해 지나갔다.
그 순간 아주 낮은 목소리가 니아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지금은 손만 써. 생각 말고'
이번에도 착각이라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도 뚜렷하고 익숙한 목소리에
니아는 나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주방 제일 안 쪽 문어를 손질했던 작업대 위에
아침보다 조금 작아진 모습으로 양파 아저씨가 다리를 툭툭 차며 앉아 있었다.
니아는 화들짝 놀라며 나가던 발걸음을 양파 아저씨를 향해 돌렸다.
'아니 아저씨..! 여기 있으면 안 되잖아요..?
아니 아니 어떻게 여기 있는 거예요?'
니아는 행여나 주방 구석에서 발주전표를 들고 ㅎ확인 중인 임영미 매니저가 들을까 최대한 작게 속삭였다.
'알아 나도'
양파 아저씨는 당연하다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왜..? 여기 있어요? 내가 못 봤으면 어쩌려고.. 썰리고 싶은 거예요??'
'그건 아냐. 단지 지금은 네가 무너질 타이밍이 아니거든'
양파 아저씨는 니아가 들고 있는 흰 도자기 접시에 이쁘게 담겨 있는 문어를 힐끗 쳐다봤다.
'저거, 네 일이야?'
'..... 어떻게 보면 맞는데 어떻게 보면 아니죠..'
'근데 네가 하고 있네?'
니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접시로 고개를 떨구며 접시의 가장자리를 조금 더 세게 쥐었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을 까 니아는 침묵을 깨고 대답했다.
'하하.. 뭐 그렇죠 이상하죠? 근데 오늘은 뭔가 더 이상해요.. 아니다 뭔가 달라요'
'뭐가 다른데?'
'평소에는 이렇게 하면 짜증 나면서 화만 났는데 오늘은 뭔가 음.. 뭐랄까
화가 나다가도 뭔가 툭 하고 끊어지는 기분..? 어딘가 시려오는 느낌..? 외딴섬에 혼자 있는..?
뭐 아무튼 그랬어요. 근데 평소보다 덜.... 아파서? 이 말이 맞나? 아무튼 괜찮았어요'
어느새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니아는 속삭이지 않고
얼굴에는 어딘가 슬픈 웃음을 띠고 담담하게 자신이 느낀 걸 이야기했다.
양파 아저씨는 이런 니아를 잠시 아무 말하지 않고 지켜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아니 그게 문제야'
'... 뭐가요?'
'평소보다 덜 아프다는 게'
니아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띠고 있자 양파 아저씨는 잠시 말을 고르듯 침묵했다.
'사람은 보통 아플 때 멈춰. 겉으로 드러난 상처든, 안에서 입은 상처든
근데 넌 안 멈췄어'
양파 아저씨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자 아리송한 표정을 짓곤 발끈하며 대답했다.
'그럼 뭐 지금 멈추면 되겠네요 그렇죠?'
'지금 멈추면'
양파 아저씨는 말을 멈추고 니아의 두 눈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네가 그동안 애써 무시하며 안 느낀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올 거야.'
니아는 가슴 한가운데에서 아주 미세하게 저릿하게 아파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저씨가 어떻게 그런 걸 알아요? 뭐 알고 얘기하는 거예요?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니아의 날 선 대답에 양파 아저씨는 웃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예전에 너도 누군가한테 이런 말을 해준 적 있거든'
양파 아저씨의 말에 니아는 머리가 순간 하얘졌다.
'제가요..? 언제요?'
양파 아저씨는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고, 대신 작은 손을 머리 꼭대기로 들곤 자신의 겉껍질을 아주 얇게 한 조각 벗겼다.
'오늘 저녁에 마저'
벗긴 겉껍질을 니아 쪽으로 슬며시 밀어주며 이야기했다.
'이건 미리 주는 거야. 받아'
순간 등 뒤에서 임영미 매니저의 날 선 목소리가 크고 또렷하게 들려왔다.
'니아야! 거기서 뭐 해? 대표님 기다리시잖아 얼른 가야지~??'
니아는 임영미 매니저의 말에 고개를 돌리며 화들짝 놀라며 하얘졌던 정신을 붙잡았고
다시금 양파 아저씨를 향해 시선을 옮겼을 땐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양파 아저씨가 앉아 있던 작업대 위에
아까의 껍질 한 겹만 남아있었다.
니아는 아무 반응하지 않고 그걸 조심스럽게 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아까보다 평온해진 표정으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문어가 담긴 접시를 들고 자신도 모르게 걸음이 조금 더 단단해진 채로
임주상 대표가 있는 사무실로 걸어내려갔다.
비루한 나무 계단을 타고 1층 카페에 내려가니 향긋한 원두의 향이
니아의 코 끝을 감쌌다.
카페 주방의 오른쪽 제일 구석에 설치된 검정 프레임의 문 안쪽에
임주상 대표가 하루를 보내는 1인 사무실이 마련되어 있다.
'대표님 문어 좀 들고 왔는데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니아는 물리적인 노크 대신 목소리로 노크를 하며 허락을 구했다.
'어 어어 왔어? 어어 가지고 와라 어'
평소에는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 한숨을 쉬거나 소리 없는 욕설을 뱉었지만
오늘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옅은 미소를 머금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에는 입구 바로 앞에 있는 큰 흰색 철제 테이블 위 모니터가 3개 설치된 컴퓨터가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고 그 앞에 있는 푹신한 검은색 게이밍 의자에 임주상 대표가 거의 눕듯 앉아
연신 핸드폰으로 시끌시끌한 쇼츠를 보고 있다.
그리고 사무실 더 안 쪽에는 화장실과 1인용 침대, 그리고 옷장도 설치되어 있다.
'여긴 봐도 봐도 모르겠네... 사무실이야 자취방이야..?'
니아는 처음 이곳을 봤을 때부터 같은 의문이 다시금 들었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고
조용히 문어가 든 접시를 임주상 대표 앞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어 어 야 고맙다 이야 야 죽이네 이거? 응? 야 응? 이거 봐라 이야'
임주상 대표는 누워있던 자세에서 문어를 향해 일어나며
연신 감탄했다.
니아는 굳이 입을 열어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끄덕인 채 나가려고 하는 순간
임주상 대표가 말을 걸어왔다.
'야 오늘 표정 좀 좋다 어? 응?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아님 오늘 좀 응? 여유롭나?'
평소 같았으면 이러한 임주상 대표의 말에
혼자 속으로 욕을 하거나 짜증을 냈을 니아지만
오늘은 어쩐지 마음이 평화로웠다.
니아는 묘한 작은 변화에 기분이 좋아져
웃으면서 꾸벅 인사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나 왜 짜증 안 내지?
이따 저녁에 물어봐야겠다. 그나저나 뭐 먹지?'
니아는 자신의 작은 변화의 원인을 고민하며 1층 카페의 유리문을 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불과 10분 전 저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며
어딘가 끊어졌던 니아는 어느덧 수면 위로 올라와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바다 위를 떠다니 듯 평화롭고 여유롭게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