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 아이들

지독하리만큼 달콤한 에고의 속삭임

by SONEA

그렇다면 대다수 인간들은

어째서 이 에고를 따라가는 걸까?

벗어나지 못하는 것 인가?

아님 벗어날 생각도 하지 않는 것 인가.




에고는 명령하지 않는다.

협박하지도 않는다.

에고는 합리적인 척 말한다.

그래서 많은 인간이

자신이 에고에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흐름을 막는 에고의 언어는

대체로 이렇게 시작된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이 말은 가장 무난해 보인다.

현명해 보이고 신중해 보인다.

그러나 이 문장의 실체는

두려움의 유예다.

때는 언제나 오지 않는다.

에고는

완벽한 조건이라는 신화를 만들어

흐름을 무기한 연기시킨다.

참 자아는 완벽한 때가 아니라

움직임이 요청되는 순간을 안다.


'조금만 더 참아보자.'

이 말은

책임감의 언어를 쓰고 있지만

실상은 자기 배신의 연장이다.

참는다는 행위가 성장일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 말은

이미 끝난 신호를 무시하기 위한 주문이다.

흐름은 참으라고 속삭이지 않는다.

흐름은 방향을 바꾸라고 조용히 알려준다.


'그래도 이게 현실이잖아.'

이 문장은 대화를 끝내버리는 문장이다.

이 말이 등장하는 순간

삶은 탐색의 대상에서

감옥으로 바뀐다.

에고는 현실을 방패로 삼아

가능성을 차단한다.

그러나 현실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장면의 연속이다.

흐름을 타는 사람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현실에 갇히지 않는다.


'다들 이렇게 살아.'

가장 위험한 문장이다.

이 문장은 책임을 분산시킨다.

고통을 정상화한다.

그리고 자기 삶의 주인을

익명 속으로 숨긴다.

에고는 집단 뒤에 숨는 데 능숙하다.

그러나 참 자아에게

‘다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여기의 나만이 있다.


'나중에 보면 이 선택이 맞았어.'

이 말은 미래를 인질로 잡는 언어다.

현재의 불편함을

미래의 보상으로 덮어버린다.

그러나 흐름은 미래에서 살지 않는다.

흐름은 지금의 생동감을 기준으로 움직인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은

대개 현재도, 미래도 잃는다.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겸손처럼 들리지만

실은 자기 가치의 축소다.

감수와 수용은 다르다.

수용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지만

감수는 부당함을 합리화한다.

흐름은 자신을 작게 만들지 않는다.

조용히 자리를 옮길 뿐이다.

에고의 언어는 항상 그럴듯하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반면에 흐름은 말이 없다.

설득하지 않는다.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몸의 미세한 신호로

마음의 미묘한 닫힘으로

조용히 알려줄 뿐이다.

그리고 단 하나의 기준만 남긴다.

이 방향으로 갈 때 나는 살아 있는가,

아니면 점점 사라지고 있는가.

이 질문을 들을 수 있다면

당신은 에고을 벗어나

이미 흐름 속에 존재하고 있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