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 배우...
연기자는 연기할 때 자신을 내려놓고 배역을 입는다고 말한다.
나는 의문이 있다. 과연 자기를 내려놓은 연기자의 연기와 자신을 놓지 못하고 배역에 나를 포함시킨 연기자의 연기를 정확히 구별해서 연기하는 연기자가 있을까? 그리고 그게 가능한가?
연기자들이 드라마를 끝내고는 상담을 받기 위해 정신과를 찾는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 인터뷰를 보면서 나를 내려놓고 연기했는데 왜 상담을 받지? 연기도 끝났으니 내려놨던 나를 주섬주섬 찾아서 붙이면 될 것 아닌가?라는 단순한 생각을 했었다. 그게 안된다면 나를 내려놓고 연기를 한다는 말은 어느 부분은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나를 내려놓고 연기했다면 연기를 내려놓고 나를 찾는 일도 쉬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쉬워야 하는 일이 어렵다. 뭐가 나고, 뭐가 연기인지 구별이 안 되는 것이다. 특히 단편이 아닌 장편, 호흡이 긴... 드라마의 경우 나와 배역의 구분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게 나였다. 나는 배역이었고, 배역은 나였다. 결코 내려놓지도 못하고 내려놨던 걸 다시 들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 와중에 나랑 호흡을 맞춰야 하는 상대 연기자는 못하겠다고 생난리를 하기 시작한 총체적 난국을 맞이하고 있었다.
대본을 수정해야 하는데 어디를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 모르는 매일이었다. 아이 아빠는 더 이상 힘들어서 못 살겠다고 하고, 아이는 나와 아빠의 눈치를 보느라 방긋방긋 웃어야 하는 아이의 역할을 잊어가고 있었다. 아이는 더 이상 아기의 모습이 아니라 눈치껏 일하는 어른처럼 눈치 보는 일에 더 능숙해져 가고 있었다.
능숙하게 어른들의 눈치를 살피는 아이가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는 아이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매너리즘에 빠진 나는 아이가 감정을 드러내 불안해하는 것이 용납이 되질 않았다. 내 그림 속의 아이는 천진하게 웃어야 하고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내 아이는 눈치나 보고 있다는 사실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아이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왜 자꾸만 징징거려! 징징거릴 거면 저리 가!"
아이는 엄마의 위협에 곧 울먹이던 얼굴을 돌려 참으려 노력한다. 어린것이 연기를 곧잘 해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기특하게도... 즐겁고 행복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울지는 않는 아이가 되어간다.
그래서 좋으냐? 아이가 울지 않으니 이 드라마는 행복한 드라마가 맞나?
아역은 어르고 달래서 꾸역꾸역 끌고 갈 수 있다고 치고 머리가 이미 굵은 성인은 갖은 회유와 협박이 먹히지 않았다. 내 대본대로 하지 않고 자꾸만 엇나간다.
아이 아빠는 더 이상 내 연출을 인정하지 않았다.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못하겠다고 버티더니 급기야 파업을 선언했다. 못하겠다고 지금 자기는 괜찮지 않다고 배역이 아닌 자신의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의 그림에는 반드시 아이와 아빠가 있어야 했다. 그게 내가 그리는 정상적인 가정이었기 때문에 지극히 평범한 화목한 가정. 그것을 위해서는 지금 힘들어 못하겠다는 저 사람의 비위를 맞춰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절대로 내가 그리는 그림에서 벗어나선 안되니까, 이 정도는 연출로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완벽한 드라마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까, 참고 맞춰주어야만 한다고 여겼다.
왜냐면 아이 아빠가 빠진 가정은 비정상이니까....
비정상은 실패니까....
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그림에는 정상이 되고 싶어서 죽을힘을 다해 발연기를 하는 내가 정상이었고, 그것을 힘들어하는 아이 아빠는 근성이 부족한 인간이었으며, 그의 호소는 투정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를 정상으로 인도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완벽한 나에게 더는 못 살겠다고 반기를 들다니... 화가 났다.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나한테 왜 그래?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 것이 보이지 않아? 눈은 뒀다가 뭐에다 쓸 거야? 정신이 어떻게 된 거야? 나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이 어딨다고....
나한테 왜 그래...
나는 내 문제를 보지 못하고, 내가 하는 비정상적인 행동은 보지 못하고, 내 발연기는 보지 못하고 그냥 대책 없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아이 아빠가 정신을 차리고 돌아와 가정을 다시 지켜주기를 말이다.
내 완벽한 가정에는 엄마, 아빠, 아이가 있어야 할 뿐이지 헤어진 엄마와 전 남편과 아이는 필요치 않았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비정상적인 모습을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던 나는 여전히 정신 못 차린 똥배우였다.
아이 아빠를 기다리는 연기도 신명 나게 할 수 있는 그런 똥배우가 나였다면, 아이 아빠는 더 이상 나와 호흡을 맞추지 않기로 결정하고 배우 은퇴를 선언했다. 더 이상 배우는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끝내 아이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똥배우도 드라마가 끝나는 건 안다.
다만 내가 똥배우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아이 아빠가 똥배우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배역을 정리하기로 했다.
비극의 주인공!
내가 이번에 연기할 배역이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혼자 살게 된 가련한 비극의 주인공!
배역은 정해 졌다.
그런데....
이번엔 내가 대본을 쓸 수가 없다.
대본을 쓰기엔 그동안 쏟아부은 에너지가 너무 많아 펜을 들고 정리할 힘도 없다.
올라가지 않는 손을 들어 한 줄 쓴 대사가
"그래서 다 내 탓이야? 내가 뭘 그렇게 잘 못했다고.... 나한테 왜 이래?"
한 줄 이었다.
나는 여전히 몰랐다. 내가 쓴 대본과 연기는 단 한 번도 정상이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내 잘못이야?... 나한테 왜 이래...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