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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잘린 지 3주 어떻게 살았나요

집을 샀어요

by 송너

추석 연휴 전에 재계약 연장이 없음을 전해 들은 후로 3주가, 퇴사일로부터는 열흘이 지났다. 나는 정말 운이 좋다고 생각한 것 중 하나. 5년 전부터 바라왔던 일명 황금연휴에 회사원의 신분이었다는 것. 마침 계약 날짜가 10월 13일까지라 말하자면 꿀 빨았다고 할 수 있겠다.


퇴사 후 갑자기 바빠지면서 정신 없이 시간이 지나갔는데, 오늘에서야 한숨을 돌리며 달력을 보니 겨우 3주 밖에 안 지나 있었다. 체감 세달은 쉰 것 같다. 그 동안 뭘 했을까. 3주의 시간을 돌아보려고 한다.


우선 바로 직전에 쓴 글을 다시 읽었다. 퇴사하면 좋은 점, 나에게 쉼을 줄 수 있다, 방통대 강의를 들을 수 있다, 사업자를 낼 수 있다. 사실은 이 중 하나만 했다. 첫 번째, 사업자는 곧 실업급여를 수령해야 하기 때문에 보류, 두 번째 방통대 강의는… 그래, 바쁘다는 핑계를 댔지만 의지 부족이다. 수업 듣기 싫고 과제 하기 싫은데 그럼 어떡해요. 요즘의 진로 고민 때문에도 들을 의욕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쉬는 것, 바쁘긴 했지만… 나름 쉬긴 했다.


추석 연휴는 연휴답게 보냈다. 연휴에만 네 팀의 친구들과 만났다. 나름 운동도 했고, 아주 오랜만에 게임도 했고, 누워서 쇼츠나 릴스만 하루종일 본 날도 있었다. 문득 뭔가 해야할 것 같다는 압박이 올 때마다 내가 아직 직장인이었어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생각하며 최대한 (평소답게) 게으르려고 애썼다.


사건은 추석 연휴가 지나자마자 생겼다. 1년 반 전부터 부동산에 내놓았던 집이 드디어 나간 것이다. 여기까지는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세로 살던 우리가 다음 집을 매매로 갈 예정이고, 다음 세입자는 당장 한 달 뒤에 들어오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2주간의 뺑이가 시작되었다…


겨우 다음 세입자의 이사 날짜를 11월 말로 미루고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매매를 원하니 이왕이면 고르고 골라 좋은 집을 찾아 가고 싶었는데 집안의 결정권자인 엄마는 또 바로 다음주에 베트남으로 5일간 여행을 떠난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부동산은 겨우 두 군데만 돌았고, 심지어 한 부동산에서는 딱 한 집만 봤다. 구경한 집이 총 7개던가 8개던가…


어쨌든 다들 장단점이 있었다. 조건이 좋으면 사이즈가 작았고, 사이즈가 괜찮으면 조건이 후졌다. 사이즈도 조건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집도 몇 군데 있었다. 결국 결정한 곳은 오히려 그 집 주인의 사정으로 제대로 구석구석 구경하지도 못했던 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마음에 안 드는 점도 많지만 우리의 예산과 시간 대비해서는 괜찮은 집이라고 생각…해야지. 어쨌든 계약금을 냈으니. 앞으로 30년을 살아야 할 집이다.


난생 처음 은행 대출도 해 봤다. 내가 받은 건 아니고 엄마가 받은 거지만, 어쨌든 옆에서 내가 다 처리해줬으니 대충 예행 연습을 했다 쳤다.


2025년의 서른 살, 1년에 몰아 별 일을 다 해본다고 저번 글에도 썼지만, 두달이 지나고 난 지금도 역시 별 일을 다 해본다는 생각 뿐이다. 작년인가 재작년에 사주 봤을 때 나한테 근 3년간 이동수가 강하다 하더니 직장도 두 번이나 옮기고 이사까지 할 줄은 몰랐다. 사실 앞으로 남은 이동이 더 있다. 양쪽 집의 이사 날짜가 안 맞아 중간에 일주일 정도는 밖에서 잠을 자야 한다. 사주는 사이언스라더니… 기가 막히게 잘 맞는다.


올해 남은 일은 이사를 잘 마치는 것, 이사 가는 김에 집안의 가전가구를 다 바꿔야 하기 때문에 그것도 전부 젊은 백수인 내 몫으로 돌아왔다. 틈틈이 진로 고민도 해야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원래 하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유 중 일부는 전 직장에서 잘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일을 잘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그게 나한테 꽤 충격이었나보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뭘 하면 좋을까 생각해보는 시간을 좀 가져야겠다.


시간이 많이 지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얼마 흐르지 않았더라. 나이가 들면 기억하는 사건의 수가 줄어들어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그럼 난 아직 젊은 거겠지. 남은 2025년의 11월, 12월은 삶의 밀도를 좀 더 올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즐겁게 열심히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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