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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주영 Sep 21. 2017

버스, 노르웨이의 숲 그리고 진공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 으로부터

1. 버스


집을 이사했다.


두 아이의 육아와 아내의 복직을 고려해 위치를 결정하다보니, 나의 출퇴근 거리는 거의 두 배로 길어졌다. 아내와 함께 천천히 고민했고 의논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거주지를 옮기고나서 처음 일주일은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했다. 새로 옮긴 거주지가 처가 근처였기 때문에 낯선 동네는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시작해 회사까지 가는 길목은 익숙하지 않았다. 정확히 어느 구간에서 길이 막히고, 어느 쪽으로 가야 빠른지 쉽게 판단이 되질 않았다. 다행히 출근 시간은 그럭저럭 지각하지 않고 잘 넘어갔다. 하지만 퇴근시간은 용인할 수 있는 범주를 초과했다. 야근을 하지않고 정시퇴근 후 집에 도착해서 저녁밥술을 떴을 때는 9시가 훌쩍 넘었다. 일주일간 다양한 방향으로 퇴근길의 최적루트를 찾아보려 했지만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점점 더 늦어질 뿐이었다. 그리하여 고민끝에 2주차 부터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을 해보기로 작정했다. (버스로 20분 + 지하철로 40분 + 도보로 20분)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를 생각하면 1시간 30분을 잡아야 하지만, 그래도 퇴근시간을 생각하면 이 편이 좀 더 나아보였다.


출근길은 대중교통도 나름 괜찮았다. 아직 어스름한 하늘아래, 이른 새벽공기를 입 안 한가득 삼키며 집 앞 정류장으로 나갔다. 이미 정류장에는 분주한 아침을 맞이한 사람들이 나란히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벌어진 소매 틈으로 서늘한 아침 바람이 들어오는게 느껴졌다. 나보다 한시간이나 먼저 하루를 시작했을 시내버스가 달려와 사람들 앞에 멈춰섰고, 사람들이 차례차례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달리는 동안 창 밖으로 느리게 지나가는 풍경 덕에 지루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환승을 위해 내려간 지하철 플랫폼에도 아침 출근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지옥철'을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었다. 생각보다 쾌적했지만, 버스처럼 창밖으로 누릴 호사는 없었다. 캄캄한 벽을 마주할 뿐인 커다란 창 대신, 스마트폰의 작은 창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시간이 무료하게 느껴졌다. 졸음 섞인 지루함에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질 즈음 열차는 내가 내려야할 역에 도착했다. 잠시 눈을 붙이고 잠을 자기에도... 그렇다고 무얼 하기에도... 참으로 애매한 시간이었다. 어쨌든 오늘도 무사히 사무실에 도착했다.


손대리~ 손대리! 손대리, 손~!, 대리님, 손대리야~~~ 미스터 손~..... 

뭐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 백번 쯤 이름을 불렸을까? 그러다보니 어느덧 퇴근 시간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업무를 마치고, 자격증 시험 준비를 하느라 평소보다 늦은 시각에 사무실에서 나왔다. 이미 어둠이 내린지 오래되었고, 퇴근시간의 혼잡함도 어느덧 잠잠해질 시각. 밖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무래도 지하철보단 버스를 타고 천천히 길게 가보고 싶었다. 버스 창 밖 풍경을 보고 싶어서다. 학생때도 늘 지하철보단 버스를 타고 싶어서 일부러 먼길을 돌아돌아 다녔었다. 그래서 오늘 퇴근길은 오랜만에 조금 천천히 가보기로 했다.


버스에 올라 혼자 앉는 창가 자리에 착석했다. 월요병에 걸린 사람들이 일찍 처소로 들어가버려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월요일 밤 거리는 생각보다 한적했다. 한산한 도로를 버스가 빠르게 질주하니, 열린 창 틈 사이로 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짧은 스포츠 내 머리가 바람에 휘날릴일은 없겠지만, 시원한 바람탓에 왠지 내 머리칼이 휘날리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버스 창문 사이로 지나가는 밤 풍경을 보고 있자니,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리속에 교차했다. 크고 화려한 불빛아래 좋은 식당들과 초고층 아파트들을 지날 때면 거기에 대조되는 내가 무척이나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다가도 다시 허름하고 불빛 없이 어두운 동네를 지날때면 괜히 교만한 마음에 우쭐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버스가 우리 교회 앞을 지나쳐 갈때면 물질의 부함과 그렇지 않음을 두고 일희일비 했던 조금 전의 마음들이 그저 죄스럽게 느껴졌다.


스스로 보기에도 얼마나 간사한 모습인지 모르겠다. 눈에 비치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만, 시야에 들어온 것에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듯 이성적으로 분별해내지 못하고 감정의 곡선을 그려내는 내 모습이 정말 우스웠다.



2.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얼마 전, 새벽 라디오를 통해 한편의 소설이 소개된 적 있다. 김애란 작가가 쓴 '바깥은 여름'이라는 단편소설 이었는데, DJ가 읽어주는 책의 한 구절을 듣고는 다음 날 곧장 서점으로 가 책을 집어들었다. 작가는 7편의 이야기를 이 책에 담았다. 어린 아들을 사고로 잃은 젊은 부부가 어떻게든 그 슬픔을 이겨내 보고자했던 모습, 부부가 새로운 마음으로 도배를 하던 중 참고 참았던 눈물을 하염없이 떨어뜨려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가슴아팠던 이야기부터 '아버지를 잃고 또 강아지를 잃은 한 아이의 상실감', '남편을 잃은 아내의 먼 여정'까지. 이들의 이야기는 오히려 소설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가슴아린 사연들이었다. 하지만 정말 당연하게 있을법한 우리들의, 우리 이웃들의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한순간 쉽게 극복하기 힘든 것이지만, 이들의 큰 상실과 공허함을 채우는 것은 결국 새로운 것 아닌 그들의 일상이었다. 늘 곁에 있었으나, 눈여겨 보지 않았던 일상의 것들이 이제 크게 덜어낸 가슴의 빈 공간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른바 우리가 살아가는 '상실의 시대'를 그려낸 김애란 작가의 이야기들은 오래전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것과는 다르지만 닮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노르웨이 숲[ノルウェイの ]'은 1987년 발표된 청춘 연애소설로 당시로서는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하지만 청춘 연애소설이라는 장르가 무색할 만큼 이 소설은 상실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 놓여진 한 젊은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한국에서 '문학사상사'라는 출판사를 통해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것을 봐도 독자들에게 이 소설이 던져주는 메시지가 어떠한 것인가를 가늠해볼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연애소설이다. 주인공 와타나베 도루(ワタナベトオル)가 세 명의 여인(어쩌면 그보다 많은)들과 공유했던 인생의 짧고 강렬했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들, 그리고 소중한 친구를 죽음 혹은 또 다른 이유로 이별하며 겪어야 했던 상실감과 그 빈 공간을 메우는 새로운 인연들의 연속적이고 동시적인 삶의 이야기인 것이다. 


어쨌든 두 소설의 이야기들은 상실과 채워짐에 대해 마치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 소중한 것들을 의도하지 않은 사이에 상실하고 또 상실의 빈 공간은 새로운 것으로, 새롭다기 보다는 어쩌면 익숙한 일상의 다른 것으로 채워져가고 여기에 서서히 적응하며 살아간다는 순리가 바로 그것이다.



3. 진공


소설 속 그들의 사연에 비할바는 아니겠지만, 그 짧은 순간, 나도 역시 그러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버스 창문을 통해 다양한 삶들을 멀찌감치 바라보며 내 자신을 투영하고, 감정을 고르고, 금새 새로운 풍경을 마주할때면 앞선 감정들을 밀어내 상실한 채 밤 도로를 내달리는 버스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선 도로 위에 쏟아 내었던 수많은 감정들을 현관 밖에 잠시 놓아둔 채 달려나오는 아이들을 무릎으로 마주하고 양 손으로 크게 들어안았다. 그 순간 다 잊었지만 영원한 상실을 아닐거다. 왜냐하면 그 밤의 시원한 바람만 그저 마주한다해도 끊어졌던 동일한 감정의 곡선이 다시 죽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상실은 분명히 삶 속에 연속적으로 우리의 일부를 덜어내고 있다. 그 덜어냄의 크기가 너무 커서 마치 비워낸 것 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알지 못하는 사이'라는 것은 덜어냄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일상이 그 자리를 채워주고 있는 까닭에 존재한다.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이라는 예능프로에서 시인이자 정치인이었던 누군가의 말과 같이 말이다. 어쩌면 그 채워짐이 더디게 와서 지금 상실의 시간을 더욱더 길고 힘겹게 만들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멈춰있는 빙하도 실상은 중력을 거스를 수 없어 더 낮은 곳으로 아주 천천히지만 계속 이동하고 있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허전한 공간들이 빈틈없이 메워져 갈 것임을 기대하며 기다리길 바랄뿐이다. 굳이 애쓸필요도 없다.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이라는 소설의 일곱번째 단편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에는 우리 가까이에서 찾을 수 있는 아이폰 iOS의 시리(Siri) 와 대화를 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슬프다'는 주인의 말에 시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이해하는 삶이란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의 모든 것이랍니다.


상실의 한 가운데에서 여전히 머리는, 가슴에서 덜어내 어디론가 아무렇게나 던져진 일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가운데 있을 것이다. 이젠 아마도 그 감정마저 익숙해져 무뎌져가는 일상. 이것이야 말로 '삶'이라고 하는 단조로우면서도 결코 지루하지 않은 그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아들, 딸. 이레와 이안이의 삶에도 분명하게 상실의 흔적이 남게 되겠지. 그것이 그때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처럼 여겨지고, 그 때문에 바닥에 코가 닿을만큼 납작히 엎드러져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결코 스스로 무너져 내리지 않길 응원할 것이다. 어떠한 일이든지 지내고 나면 그것이 삶 위에 완벽한 거름으로 뿌려지길 기대할만큼 성숙한 아이들로 자라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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