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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주영 May 17. 2019

Good timing for assist

하나님께서 내 삶 가운데 마침내 일하시는 순간

1.배움터를 향한 발걸음


지금 첫째 아들이 6세로 유치원에 다니고, 둘째 딸은 4세로 아직 유치원 다닐 나이가 되지 않아서 주로 아내가 문화센터 같은 곳에 데리고 다니면서 발레나, 블록놀이 같은 것을 배우고 있다.


어느 것을 할 것인지 결정하기까지 어느 정도는 아내의 민주적 절차에 의해 아이 본인의 생각과 의사도 반영되었겠지만, 내 어릴적에는 나의 의사보다는 어머니가 정해준 학원을 여럿 다녔던 기억이 난다.


피아노 학원, 태권도 학원, 미술 학원


남자가 무슨 피아노냐며 학원에 가길 완강히 거부했지만, 종아리에 회초리를 몇 대 맞은 뒤에 결국 동네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다. 태권도나 미술학원은 크게 거부하지 않고 등록했다. 내가 거절해도 의사가 반영되지 않을거란 것을 이미 한번 경험했기 때문에 학습효과에 따라 자연스럽게 등록해서 다녔다.


다른 학원은 나 혼자 다녔는데, 미술학원은 동생과 함께 다녔다. 동생과 나는 세 살 차이가 났지만, 어머니의 요청으로 늘 나와 동생은 같은 반에서 수업을 받았다. 수업의 수준은 어린 동생이 따라오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생각보다 곧 잘 따라왔다. 대부분의 수업 방식은 선생님이 무언가를 그리라고 주제를 주시면, 그 날 정해진 미술도구에 따라 흰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고 중간중간에 선생님의 코치를 받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학기가 마무리 되면 학원에서는 반기동안 본인이 그린 작품들을 문집처럼 묶어서 본인에게 돌려준다. 집에 가져왔을때 나도 나름 열심히 한 것이지만 부모님은 동생에게 더 많은 칭찬을 해주셨다. 물론 나에게도 수고했다 잘했다 하며 칭찬의 말을 주셨지만 동생의 것과는 무게가 다르게 느껴졌다. 내가 보기에도 동생의 그림은 내 그림들보다 뛰어나 보였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2.어시스턴트의 역할은 어디까지?


학원에서 과제를 수행할때 나와 또래들은 선생님의 간결한 지시에 따라 본인 생각대로 그림을 그렸다. 물감에 물 농도를 더 묽게 하라든가, 덧칠을 하지 말라든가 등등 선생님이 말로만 조언을 해주셔도 어느 정도는 따라 그리며 목표로 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의 어시스트도 딱 그 정도였다. 그렇지만 동생은 늘 Class안의 또래 보다 동생이고 경험도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선생님의 전담 어시스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때로는 붓을 쥔 동생의 손을 선생님이 크게 감싸고 함께 그려주시기까지했다. 동생의 그림들은 선생님의 어시스트가 내 것보다 배는 더 들어간 작품이다보니 더 완성도가 더 높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그런 선생님의 어시스트가 개인의 역량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될지 아니면 방해가 될지 뚜렷하게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에서야 내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능력없음을 고백할때 비로소 하나님의 어시스트가 내 삶에도 본격적으로 개입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내가 혼자 다 할 수 있어요.' '내 그림에 손대지 마세요.' 라는 것보다, '어렵네요 이럴땐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저로서는 이것을 완성시키기에 좀 부족한데 도와주실 수 있나요?' 라는 편이 지혜라는 것이다.


군을 전역하고 처음 교회에 등록한지 일 년쯤 되었을때 한 부서의 봉사 자리에 대한 제의를 받았다. 나는 교회를 다닌지도 얼마 안되었고, 성경도 잘 모르는데 과연 그런걸 해도 되나 싶어 고민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담당 교역자였던 당시 전도사님이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하는거야, 내가 능력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받은 도움에 대해 감사할 수 있고, 결과에 대해 겸손할 수 있거든.' 그 날 이후로, 내게 주어지는 모든 제안과 요청에 대해 거의 대부분 수용하고 순종했다. 그 일들은 이미 내 능력안에서 능하지 않았으나, 언제나 돕는 손길이 있었고 거뜬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거기에는 내가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것은 비단 교회안에서의 일뿐 아니라 직장에서, 가정에서, 친구와의 관계속에서마저도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의 결과에 대해 경거망동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3.달려라 이레야, 이안아!


우리 가족이 함께 하루 일정을 소화한 뒤, 집에 돌아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집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길에 이레와 이안이는 늘 경주를 한다. 방금까지도 피곤해서 카시트에 푹 파묻혀 잠을 자던 녀석들이 그 순간만큼은 우사인볼트 처럼 경주를 하려한다. 당연히 이안이는 오빠 이레를 이길 수 없다. 이안이도 그걸 알기 때문에 언제나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아빠, 빨리! 빨리!' 이건 나더러 자기를 안고 뛰라는 압력의 표현이다. 내가 이안이를 번쩍들어 안으면 그때부터 마음이 급해진 이안이는 허공에 팔다리를 휘저으며 빨리가라고 난리법석을 친다. 그러면 못 이긴척 나는 이안이를 안고 성큼성큼 걸어서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기 2m전에 이안이를 내려놓는다. 그러면 이안이는 저 멀리 헥헥 거리며 달려오는 오빠 이레를 바라보며 신나서 외친다. '이것봐라, 이안이가 이겼지! 오빠 빨리와라, 이안이가 이겼거든!' 참 귀여운 녀석들. 너무나 사랑스럽다.


작고 사소한 것들이지만, 이 안에서도 사실 아빠의 도움보다는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에 도취된 이안이를 보며, 그래 사실 정말 아무렇게나 말해도 전혀 상관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 녀석아 아빠 덕분에 너가 오빠를 제칠수 있던거야 라고 알려주고 싶다.


아빠로서, 이레와 이안이의 삶에 이러한 것들을 깨닫는 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일이 잘 풀려갈 때에 누군가 나에게 주는 도움에 대하여 감사하고, 힘들 때에 나를 위해 여전히 응원하고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힘을 내기를 바란다. 어떤 것도 나의 잘남과 나의 실력만으로 성취되지 않음을 반드시 깨달았으면 좋겠다. 물론 노력과 흘린 땀의 댓가로 주어지는 성취를 맛보며 그 안에 기쁨을 누리는 것도 없어서는 안 될 경험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언제나 내가 모르는 도움과 배려가 공동체 안에 있음을 기억하며 어쨌거나 감사할 줄 아는, 그리고 그 감사를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의를 내려놓는 것이다. 도움들이 항상 내게 있으나 그것을 감사로 여길 줄 아는 것은 곧 스스로 나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일하시는 방식도 그러하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선조들의 이야기를 봐도, 그가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곧 이제 자신의 능력 아닌 하나님께 의지할 때 비로소 그들의 삶의 문제에 개입하사 상식을 넘는 방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이 각자의 삶 속에 온갖 문제들을 마주할 때, 자기한계를 인정하고 나의 부족함을 시인할 줄 아는 지혜가 있기를, 바로 그 때가 나에게 참 된 도움이 비춰지는 순간임을 깨닫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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