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67일차 빌립보서 1:1-11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2024 파리올림픽의 열기가 한창이다. 파리 올림픽은 33번째 하계 올림픽으로 1924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후 정확히 100년만에 파리에서 열리게 되었다. 요즘 한창 태권도를 배우고 있는 우리 아이들이 태권도 시합은 언제 열리냐며 물었다. 대한민국에서는 태권도 종목에 남녀 각 2명씩, 총 4명이 출전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태권도의 종주국이기도 하고 대한민국 국적의 남자라면 거의 대부분 태권도를 배우게 되기 때문에 국민적 관심과 기대를 많이 받고 있는 종목이기도 하다. 나도 어릴 적에 태권도를 배웠다. 30여년이 흐른 지금은 머릿속에 품새를 아무리 떠올려봐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정신과 예절에 대한 것들은 여전히 내 마음에 남아있다.
나의 학창 시절에는 선생님들의 체벌이 어느 정도 허용되었다. 성적이 떨어지거나, 품행이 바르지 못하면 다양한 방법으로 체벌을 받았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학생들 대부분은 그러한 체벌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초리로 맞고 나면 나는 반사적으로 "감사합니다!" 라며 크게 인사했다. 주변에 함께 맞던 친구들도, 때리던 선생님도 의아하게 나를 쳐다봤지만 그것은 내가 어릴 때 부터 태권도를 배우며 몸에 익히게 된 것 중 하나였다. 의미라면, 스승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항상 갖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만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사실 회초리로 맞을때 거의 반사적으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여하튼 태권도를 배우며 내가 배우고 익힌 습관은 힘든 상황에서도 가능성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불만스러운 상황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태도였다. 오늘 말씀 속에서도 이와같은 것을 가르쳐주신다. 빌립보서라는 편지를 쓰고있는 바울과 그 편지를 받게 될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모두 녹록치 않은 상황에 놓여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고 기뻐하길 권면하고 있다. 어려움 속에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그리스도 예수 주 안에서 복음이라는 진리와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바울이 스승과 제자라는 디모데와의 수직적인 관계를 수평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스승과 제자는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가 있는 관계임에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함께하는 동역자로서 디모데를 평등한 관계로 인정하고 있다. 주 안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높고 낮음이 따로 없다. 지식의 높고 낮음, 부의 높고 낮음, 나이의 높고 낮음, 지위 따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주 안에서 우린 평등하다. 그러나 세상은 이것을 때때로 잘못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진리와 진리에 어긋난 것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평등(平等)"이라는 가치를 옳지 못한 것을 옳은 것과 혼동하게 하려는 일에 오용(誤用)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성(性)'과 관련된 가치와 범죄에 대한 문제가 상당히 심각하다.
모든 평등의 가치는 주 안에서 용납 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한 평등은 그릇된 가치를 묵인하고 동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감사와 기쁨도 마찬가지다. 주 안에서 용납될 수 없는 기쁨은 쾌락일 뿐이며, 그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한 감사는 욕망의 실현일 뿐이다.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되 언제나 주 안에서 그 기준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