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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주영 May 11. 2016

푸슈킨

표리부동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은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알렉산드르 푸슈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


푸슈킨은 러시아 근대문학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 그의 시는 좋아한다.

사랑에 관한 멋진 시들을 남겼고,

그를 모른다 해도 그가 남긴 시나 명언들은 누구나 한번 쯤 들어보았음직 할 것이다.


하지만 그를 그다지 신뢰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삶 가운데 어려운 상황에서도 참고 견디는 것을 노래한 명시를 남긴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결투를 하게되며 이 싸움으로 인해 요절했다.

아무리 좋은 말과 가르침을 남겨도 그의 행실이 그러하지 못한다면 그 영향력은 반감될 것이다.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고 하여도 사람마다 들이대는 잣대가 다르고 비난의 정도가 다른 것 또한 그들이 말로써 대중에게 보여주고 심어주었던 기대와 실제 삶의 모습 사이의 어긋남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저명한 목사님이나, 연예인들, 정치인들도 사람인지라 넘어지고 간혹 잘못을 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저항하기 어려울 만큼 비난이 쏟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라면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사실 성경에서는 곳곳에서 이와같은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이 어떠한가를 엿볼 수 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태복음 6:27~30>


성경에서 제자들은 자신의 모든 삶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른 자들이다.

이 모습을 보고 우리는 그들의 믿음이 우리 중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깊다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위의 말씀을 비롯하여 성경의 곳곳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믿음이 작다는 질책을 수 없이 받게 된다. 이는 그들의 겉 모습에서 보여지는 믿음과 달리 마음 가운데에는 여전히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구석이 있음을 예수님이 아시는 까닭이다.


사람의 혀는 간사해서 그 어떤 누구라도 현혹시킬 수 있는 말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혀가 아닌 마음을 보시는 분이시다.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 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요구하신다. 입술의 고백이 아닌 마음의 변화를 바라고 계신다. 그리고 그 마음이 진정 변화 된다면 그의 삶은 저절로, 당연히 따라오게 되는 옵션과도 같다고 야고보서에서 가르치고 계신다.


청년시절 들었던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난다.

표리부동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있다.

그리스도 인이라면 입술의 고백뿐만 아니라 삶으로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성경을 읽는 것은 믿음 없이도 가능하다.

하지만 삶으로 살아내는 것은 마음의 변화가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나는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며 기독교를 향한 수많은 비난의 화살을 경험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비난은 단 한번도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성경의 메세지를 향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표리부동의 수많은 기독교인들, 입술로는 경건을 말하지만 몸으로는 온갖 음란과 부정한 것들을 내지르는 안타깝고 죄악스러운 모양에 던지는 화살이었다.

세상 사람들의 비난은 틀리지 않았다.

기독교가 표리부동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야말로 "개독"이 되는 것을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봐야할 것은 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기독교야 말로 표리부동하지 않는, 진정 말과 행동이 일치함을 표방하는 종교라는 것이다.

유교는 공자의 삶과 행동이 아닌 공자의 가르침을 따른다.

불교도 그렇다.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따르고 있을 뿐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종교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하신 말씀과 약속을 어긴일이 결코 없다. 

"크리스천", 곧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스스로 칭하는 말이 아닌,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의 모습을 보고 되려 이방인들이 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곧,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스스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삶으로 보여주었을때 주변으로부터 "그는 진정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사람이다."라는 칭함을 받는 종교인 것이다.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지금 우리 세대 교회의 이러한 모습들이 반드시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고 느낀다.

자정의 능력을 상실한 세대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징계뿐임을 이미 성경에서 여러번 경험하지 않았던가. 망하고 흔들리고 뒤집어져 사라진 나라와 세대를 타산지석 삼아 반드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아야 할 것이다.


다시 러시아의 그 시인을 잠시 돌아보자.

푸슈킨, 물론 그의 행동이 이해는 간다.

왜냐하면 그가 결투를 벌인 것은 다름 아닌 아내를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푸슈킨의 아내에게 수많은 남자들이 추파를 던졌고 그 중 한 남자였던 프랑스 귀족 당트와 권총결투를 벌인 끝에 둘 다 사망에 이른다. 아름다운 아내를 사랑하는 푸슈킨의 마음을 깍아내리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시에서 처럼 참고 넘어갔다면 조금 더 오랫동안 사랑하는 아내 곁에 머무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누구라도 그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았으니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멋진 시와 38세 마감이라는 안타까운 삶. 이 둘 사이의 부조화는 역사 속에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아무튼 결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표리부동, 언행불일치가 아닌, 행동하고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가르침대로 직접 삶을 살아가며 아름다운 영향력을 끼치는 것임을 기억해야겠다. 나의 아들과 딸 역시 크리스천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결코 말만 번지르르한 크리스천이 되지않길 바랄뿐이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미움받고 하나님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인생이다.

경건의 모양만 있을뿐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삶이 아닌, 선한 영향력을 가진 자녀들로 살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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