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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주영 May 12. 2016

이대도강(李代桃僵)

작은 것을 내주고 소중한 것을 취하는 현명함

중국에 전해지는 악부시집에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이대도강[李代桃僵] ; 자두나무가 복숭아 나무를 대신하여 넘어지다


계명(鷄鳴) 이라는 시에서 유래한 성구로 전문은 이러하다.

복숭아나무 우물가에 있고 자두나무 그 옆에 있다
[桃生露井上, 李樹生桃旁]

벌레가 뿌리를 갉자 자두나무가 대신해 시들었다
[蟲來嚙桃根, 李樹代桃僵]

나무도 서로 그런데 형제야 어찌 서로 잊을 손가
[樹木身相代, 兄弟還相忘]


내용을 살펴보면 우물가에 복숭아 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그 옆에 자두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벌레들이 자두나무 뿌리를 갉아먹으니, 자두나무가 복숭아나무를 대신하여 죽었다고 여겨 옛 사람들은 이것을 형제의 우애에 빗대어, 대신하여 죽지는 못할망정 서로 헐뜯는 인간들을 안타까워하며 시로 표현한 것이었다.


여기서 표현된 이대도강이라는 사자성어는 중국의 고대병법인 손자병법 36계중 11번째 계책에 인용이 되어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라는 것의 의미로 재해석 되었다. 오늘날에도 이것은 실제 전술과 정신적인 전술 양면에서 아주 중요한 맥으로 전해지는데, 내가 검도를 배울 때 도장에 이런 글귀가 걸려있었다.


相對가 너의 털을 베면
너는 살을 베고
살을 베면 뼈를 끊어라



전장에서 완벽한 승리는 없다.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후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작은 것을 잃었을 때 후퇴하지 말고 더 큰 것을 취하기 위해 전진하라는 기상이다.

앞서 언급한 병법과 함께 생각해보면 전술적으로 상대의 뼈를 취하기 위해 털과 살을 내어 주는 고통을 감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이야기는 성경에도 기록되어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
- 아모스 2:6

작은 물질 때문에 사람의 생명도 가벼이 여기는 행태에 대하여 분노의 질타를 쏟아내고 있는 것이 보이는가.

구약성경에서 이와같은 진노의 표현은 죄에 대하여 생명의 불씨를 남겨두지 않겠다는과격한 뜻으로 이해해도 된다.


과연 우리 삶 속에 이러한 모습들이 있을까.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친구간 신의를 저버리거나, 부부간 다툼을 벌인다면 그것이야 말로 소탐대실이 아니겠는가.


중학생때 친구들과 극장에가서 "글래디에이터" 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 영화의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주인공 막시무스는 검투사로 전락하기 전 세계최강 로마제국의 장군으로서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가 가장 총애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매우 용맹하고 강인한 장군으로서 결코 전장에서 적장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뒤돌아 도망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을 가졌다.

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이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은 자신이 섬기는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였고,

다른 하나는 전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뛰어와 안기는 어린 아들을 안아줄 때였다.

사랑하는 자녀 앞에선 호랑이 같이 용맹한 장군의 자존심과 품위는 더이상 가치없는 것 일뿐이었다.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명예처럼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처럼 잠시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다.


그렇다면 내려놓는 것은 막시무스 장군처럼 무언가 많은 것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나는 최근 내 아들 이레의 모습을 보며 그러한 것들을 느낀다.

이레는 이제 겨우 3살.

아직 내 것, 남의 것의 개념 구분이 정확히 없을 시기이다.

이레가 점심을 먹고나면, 아내는 이레에게 날마다 뽀로로가 그려진 작은 플라스틱 접시에 간식을 담아서 준다.

그러면 이레는 그걸 들고 자신만의 자리로 가서 냠냠냠 맛있게 먹는다.

그런데 간혹 아빠가 나서야 할 때가 있다.

야쿠르트 병에 빨대를 꽂아야 하거나, 낱개로 포장된 과자의 봉지를 벗기는 일은 이레에게 아직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야쿠르트 병이나 포장된 과자봉지를 집어들면, 이레는 자신의 것이 빼앗긴다고 생각했는지 슬픈표정을 짓다가 이내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그러면 언제나 나는 이레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이레 거야, 이레 주려고 그러는거야, 이레 주려고 아빠가 도와주는거야."

처음엔 이렇게 말해도 울음을 그치지 않고 바닥에 주저 앉아 울었지만,

그래도 요즘은 금새 기억해내서 그런지 빨리 달라며 내 한쪽 다리에 메달려 끙끙거린다.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지 않을까.

완전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잠시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때로는 손해를 감수해야할 때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할 때, 그녀를 집 앞까지 바래다 주는 일이 사실 번거롭고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것으로 인연을 얻는다면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고 말 것이다.

반드시는 아니지만, 선배가 되려면 때로는 지갑을 열고 후배들의 점심을 책임질 줄도 알아야 된다.


대학교 학부시절, Computer Engineering를 전공했던 나는 A.I.(인공지능)와 관련하여 재밌는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다. 여러 언덕 중에서 가장 높은 언덕을 찾아가는 Logic을 만드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주 쉽다고 생각했다. 주변 동서남북 8방향 중에서 가장 높은 지점으로 한 칸씩 이동하다 보면 결국 가장 높은 지점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나의 Logic으로는 눈 앞에 언덕을 올라가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옆에 더 높은 정상이 있었지만, 지금 당장 주변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내리막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 정상에 오르는 것은 내려가는 방법을 알아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작은 것을 내주고 소중한 것을 취하는 현명함.

얻기 위해 내어주는 기다림.

살리기 위해 희생하는 정신.


물론 나에게도 정말 부족한 것이지만,

이러한 지혜가 이레의 삶 속에 있기를 아빠로서 소원한다.




(선배 劒友께서 남기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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