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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주영 Sep 01. 2016

하나님은 왜 총을 쏘는 자의 방아쇠를 멈추지 않으셨을까

라비 재커라이어스(Ravi Zacharias)의 기독교 변증

1. 새옹지마(塞翁之馬)
북방 변두리에 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노인이 기르던 말이 국경을 넘어 도망쳤다.
그의 이웃이 찾아와 위로의 말을 전하자 노인은
“이 일이 복이 될지 누가 압니까?”
하며 태연자약(泰然自若)했다.

얼마 후, 도망쳤던 말이 암말 한 필과 함께 돌아왔다.
이웃이 다시 찾아와
“정말 말씀하신대로 복이었네요!”
하며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노인은
“이게 화가 될지 누가 압니까?”
하며 기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노인의 젊은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낙마하여 그만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이에 이웃이 다시 위로를 하자 노인은 역시
“이게 복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오.”
하며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북방 오랑캐가 침략해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라에서는 전쟁을 위해 징집령을 내렸고, 신체건강한 젊은이들은 예외없이 모두 전장에 나가야 했다.
하지만 노인의 아들은 다리가 부러진 까닭에 전장에 나가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중국 전한(前漢)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저술한 < 회남자(淮南子)> 인간훈()편에 소개된 이야기로 우리에게는 인간만사 새옹지마( ) 라는 고사성어로 잘 알려져있다.


얼마 전, 기독교 변증가로 유명한 라비 재커라이어스(Ravi Zacharias)가 대중과의 대화 중 인용하여 설명했던 적이 있다. 그는 이 이야기를 통해 온갖 고난과 재앙 앞에 마치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께 대하여 분을 내는 사람들에게 인내와 믿음을 강조했다. 작은 사건 사고가 미칠 영향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우리의 근시안적 사고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은 왜 악한 일들을 강제로 멈추지 않으실까?

지난 2014년 4월에 온 국민에게 잊을 수 없이 슬픈 사건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 "세월호"라는 인천발 제주행 여객선이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는 사고가 벌어진 것이다. 이 사고로 인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던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을 비롯하여 300명이 넘는 희생자가 생겼고, 이 사고 이후 정부 관계처의 미덥잖은 대응으로 국민들의 원성과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당시 나도 뉴스를 통해 소식을 접했지만, 조선시대도 아니고 이렇게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이 시대에 서서히 가라앉는 배 안의 승객들을 제대로 구조하지 못하고, 손놓고 발만 동동굴러야 했던 순간들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다. 슬픔을 넘어 충격과 분노가 가득했던 시간들이었다.


본격 구조작업이 시작되면서 당시 승객들의 시신과 유품들이 대거 수집되었고, 그중에서 아이들이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휴대폰 영상도 복원되어 대중에 몇몇 공개가 되었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것은 한 아이가 촬영한 영상으로, 심하게 기울어있는 배 안에서 구명조끼를 입은 학생들이 모여서 겁먹은 친구를 위해 함께 손을 잡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이었다. 창밖으로는 구조대의 보트와 헬기가 보이고 아이들도 곧 구조될거니 걱정하지 말라며 밝은 목소리로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상을 촬영한 친구와, 영상 속 학생들 모두 구조되지 못한채 하늘나라로 가고야 말았다.


이것은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했는데, 마치 외면받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이 아이들을 살리는 것에 대하여 반대할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모두가 동의하는 이 부분에 대하여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일까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이러한 안타까운 사건사고들이 종종 벌어진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내전을 겪고 있는 수많은 유럽의 국가들로부터 난민이 발생하고 무장테러단체로 인해 고통받고 희생당한 사람들의 소식들도 매체를 통해 연일 보도가 되고있다. 이러한 뉴스들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적을 보여달라고 기도해보지만 대다수가 기대했던 기적은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께 능력이 없어서 일까? 강철 수트를 입은 아이언맨은 초음속으로 지구 곳곳을 누비며, 테러리스트의 총과 대포를 무력하게 할 수 있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그 영화 속 히어로보다도 능력이 없으신 걸까?


그렇지 않다.

그 이유를 라비 재커라이어스(Ravi Zacharias)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3. 아내를 사랑하는 방법
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과 아내.
이 두 사람은 서로 정말 사랑한다.
남편은 직장을 다니고, 아내는 전업주부로서 살고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가만히 보니 옆집 남자가 굉장히 잘생긴 것 같아 보인다.
심지어 돈도 많고, 친절하기까지 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남편은 아내에게 그 남자에 대해 넌지시 물어봤다.
아니나다를까 아내도 남편과같이 그 남자에 대해 굉장히 호감있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 날 이후 남편은 고민에 휩싸였다.
'내가 없는 동안 아내가 그 남자와 몰래 만나면 어떡하지? 그러다 바람이 나면 어떡하지?'

그래서 남편은 결단을 내린다.
출근을 할 때 아내를 집 안에 두고 문을 밖에서 잠그는 것이다.
자신만 열 수 있도록 아주 튼튼한 자물쇠로 걸어잠궜다.

남편은 이것이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내가 죄를 저지를 수도 있기 때문에 아내를 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말한다.

이 이야기는 청년시절 성경에 관해 가졌던 의문에 대하여 목사님이 말씀해주신 대답에 인용하신 예화였다.


내가 가졌던 의문은 이러했다.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절벽이나 동굴 속, 혹은 바다 깊은 곳에 감춰두지 아니하시고, 모두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곳에 두셔서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도록 만드셨나? 하다못해 선악과 나무 주변에 높은 담이라도 쌓아 두셨더라면 인간이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목사님은 나의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이라는 답을 주셨다. 이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라비 재커라이어스(Ravi Zacharias)의 대답과 같은 것이었다. 진정한 사랑은 정해진 틀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정답을 정해놓고 문제를 푸는 것도 아니다. 사랑을 할 때 모든 것은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되며, 선택을 하게 된다. '자유''사랑'을 위한 필수조건이 되는 것이다.


다음 주면 사랑하는 아내의 생일이 다가온다.

난 늘 항상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갖고 싶은게 있는지 묻지만, 아내의 대답은 한결같다.

"나에게 묻지말고, 당신이 생각해 봤을 때 나에게 주고 싶은 걸 주면 되요. 마음이 중요한거지 선물이 중요한게 아니에요."

그래서 결국 나의 고민은 더욱 깊어진다(^^;;)

사실 아내의 말이 맞다. 서로 필요한 걸 이야기 하고 그걸 사주는 것은 어쩌면 주문하고 배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상대방을 위해 나의 자유로운 의지로 선택을 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마음을 담는 것. 바로 사랑의 실천인 것이다.




4. 자유의 댓가

모든 일에는 책임이 따른다. 자유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어진 자유와 선택에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른다. 갈림길에 다다랐을때, 개인의 선택에 따라 오른쪽으로 갔지만 가다보니 이 길이 아니라면,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비용이 수반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위기나 어려운 순간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우리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내달라고 이야기 한다면, 이것은 우리 스스로 자유를 반납하고 사랑의 대상이 아닌 관리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수용소에서 포로들을 향해 총을 쏘려하는 군인의 방아쇠를 멈추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무능력하다거나, 사랑이 없다고 해서는 안된다. 새옹지마()의 노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일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계획과 결과를 보여주실지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1970년 11월, 아름다운 청년 (故)전태일님은 비록 생을 다했지만, 그의 죽음이 이 사회에 미친 영향을 우린 이미 경험한 바 있지 않던가. 역사 속에 기록된 안타까운 사고와 희생자들이 이 사회 안전망을 더욱 견고히하고 안전한 국가가 될 수 있도록 영향을 끼쳐왔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이 땅은 여전히 우리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놓고 있다. 그럴때마다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사고와 희생에 대하여 하나님의 개입이 없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이 일들을 통해 일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우리 사회를 향한 건강한 비판을 함께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더욱 견고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5. 걸음마

내가 퇴근 후 집에가서 현관문을 여는 순간, "아빠~~~!" 하면서 아들 이레가 양팔을 벌린 채로 전력을 다해 뛰어나온다. 그렇게 뛸 수 있게 되기까진 수도 없이 넘어져야 했다.

처음엔 혼자 서 있는 모습도 중심을 잡지못해 위태위태 했다. 그렇게 한발짝 떼는 순간 균형이 무너지며 꽈당하고 넘어진다.

"으앙~"

이리 꽝, 저리 꽝 그러다가 이마를 모서리에 찧기도 하는데, 그렇게 이마에 상처가 나면 나의 마음이 너무나 아프다. 아프다 못해 아내를 향해 잡지 않고 뭐했느냐며 원망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는 덤덤하게 말한다.

"잡아주면 안되요, 넘어져도 봐야지. 그래야 걷죠."


아내의 말이 옳다. 아이가 넘어지는 것이 걱정된다고 해서 계속 업고 다닐 수는 없는 것이다. 아이 스스로 적당한 실패를 경험하게 하고 실패로부터 학습할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봐주는 것이 부모에게 필요하다. 만일 부모가 아이의 모든 행동과 선택에 개입하여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인 선택을 하도록 지시하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그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성장을 가로막는 길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방관과는 다르다. 늘 관심을 갖고 지켜보며, 아이와 함께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여전히 하시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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