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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주영 May 17. 2016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그림자같은 영화

오감 [five senses, 五感]


시각 [light sense, 視覺]

국민학교시절 시, 도 교육청에서 주최하는 사생대회가 자주 있었다.

주어진 주제에 맞게 열심히 노란색 크레파스로 밑그림을 그리고 초록색, 황토색의 크레파스로 산과 나무를 칠한 다음, 하늘색 수채 물감으로 하늘을 적셔주었다.

나름 만족했다.

옆에서 잘 그렸다고 칭찬을 해주시니 매우 흡족했다.

도화지 뒷면에 검정색 크레파스로 학교명, 학년반, 이름을 또박또박 적고 당당히 본부석에 그림을 제출했다.

'이제 얼마 뒤면, 운동장 조회 시간에 사생대회 입상자들이 호명될 것이고, 그럼 난 구령대로 뛰어 올라가

교장 선생님께 상을 받겠지. 나의 그림은 액자에 끼워져 학교 1층 복도에 전시될 것이며, 학부모들이 학교를 방문할 때 나의 그림을 보며 감탄과 함께 내가 누군지 궁금해 하시겠지?' 라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 했다.


이윽고, 월요일 운동장 조회 시간이 되었다.

마이크를 쥔 선생님께서 예상대로 지난 화홍문화제 입상자들을 호명하고 있었다.

구령대 단상에는 상장과 상품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내건 어떤 걸까? 으흐흐..'

먼저 백일장 입상자들이 호명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비극이 벌어졌다.

그림대회 입상자를 호명하는데, 나의 이름이 빠진 것이었다.

'어? 이상한데..'

우리 학교에서는 그림대회 입상자가 2명이 나왔는데, 어떤 6학년 누나와, 엄청 뚱뚱한 우리 반 친구가 당첨이 되었다. 그리고 교장실 옆 복도에는 그 두 사람의 별로 잘 그리지 않은 그림이 걸렸다. 뭐 적어도 내가 볼땐 그랬다. 특히 우리 반 친구의 그림이 입상한 것을 두고 난 참 이해가 안갔다. 왜냐하면 분명 주제는 '정겨운 시골마을' 이었는데, 그 녀석의 그림은 큰 소 한마리가 딱!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파란색으로 칠한 흉측한 소가 있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정말 끔직한 그림이었다.

어른들은 정말 저 그림이 잘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저 색깔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걸까?



미각 [taste sense, 味覺]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어릴 적 나를 무척 이뻐라 해주시던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의 형제가 8남매여서 할아버지 생신 때는 온 친척들이 모두 모이면 사촌들까지 30여명이 모여 북적북적 대었다. 고모들이 많다보니 고모부도 자연스럽게 많았다. 그래서 잘 몰랐던 어릴 때는 그냥 그 정도 나이대의 아저씨를 "고모부"라고 부르는 줄 알고 친구 아버지께도 고모부라고 불렀다가 모두를 당황케 한 적도 있다. 아무튼 그렇게 집안에 잔치가 있는 날이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술"이었다.

고모부들은 바로 옆에 앉아 있으면서도 왜 그런지 모르게 술만 마시면 큰 소리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으셨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큰 소리로 나를 부르시는게 아닌가?

'오잉?'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고모부께로 갔다.

고모부는 나에게 유리잔을 주시며 들고 있으라고 했고 갑자기 드시던 맥주를 따라주셨다.

사실 아까부터 난 이 맥주를 계속 호기심 있게 쳐다봤다.

왜그런가 하면 그동안 봤던 술은 소주랑 막걸리 같은 거였는데, 이건 사이다 처럼 '사아악' 하고 탄산이 막 올라오는게 아니겠는가. 노란 색깔도 왠지 모르게 먹음직스러워 보여서 계속 쳐다보게 되었다. 그랬더니 그걸 보신 고모부가 한 번 먹어보라며 나에게 주신 것이다.

'와우'

컵에 손톱만큼, 양을 아주 조금 주셔서 상당히 실망스러웠지만, 일단 한 번 먹어봤...다.

그런데...

그 순간 깜짝 놀라서 입에 머금고 있던 맥주를 밥상에 '퉤'하며 뱉어버렸다.

'맥주인줄 알았는데 오줌이라니....'

사실 오줌은 아니었지만 찌릿찌릿하며 시큼한 이상한 맛이 났다.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를 경험했다.

아니 이걸 도대체 왜 식사를 하시며 드시는 걸까? 이게 정말 맛있어서 드시는 걸까?



감각의 주관적 이해

우리의 감각은 시각과 미각 외에도 청각 [auditory sense, 聽覺], 후각 [sense of smell, 嗅覺], 촉각 [tactile sense, 觸覺]을 더하여 오감 [five senses, 五感] 이라 불리운다.

눈, 코, 입 등 신체에 있는 각각의 감각기관을 통해 전달되는 적합자극으로 사물과 환경의 상태를 파악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주관적인 견해보다는 사물의 상태 그대로의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받게 된다.

그런데 정말 객관적인 정보일까?

왜곡된 혹은 과장된 정보는 아닐까?

이런 생각의 시작은 청각에 대하여 배우면서 부터이다.

청각은 공기의 진동을 귓바퀴를 통해 신체에 전달받아 귓 속의 고막에 전달된다. 고막의 진동은 청소골이라 불리우는 뼈를 진동시킴으로 증폭되어 달팽이관에 전달이 되는데, 핵심은 바로 여기다.

"증폭(빛, 음향, 전기 신호 등의 진폭을 증대시키는 것)"

소리가 증폭된다는 것은 실제 그 소리가 가지고 있는 것 보다 과장된 사이즈를 우리 뇌가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감각기관이 전달해주는 정보는 신뢰할 만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어린 시절 나는 여러번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감각과 판단이 어쩌면 "가짜 정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2001년 개봉한 잭블랙 주연의 영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에 멋진 대사가 나온다.

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아름다움이란 보는 눈에 따라 다르게 비춰진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동의가 되는 말이다.

미의 기준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기준이 들어가기 때문에 같은 상[像]을 봐도 느끼는 바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오감의 불확실성은 이러한 주관적 견해의 차이를 넘어서는 것이였다.


'내가 보는 파란색이 실제 파란색이 아닐수도 있다.'

'내가 먹는 수박이 수박이 아닐수도 있다.'

'나는 꽃향기를 맡으며 향기롭다 하지만 사실 다른 사람 코엔 악취가 날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향기라는 단어로 일치화 된 네트워크상의 오류적 현상일뿐(?)이다'

라는 막연한 상상을 해봤다.


다시 말해, 이러한 상황이다.

A와 B라는 두 사람이 동일한 돌덩이를 쳐다보고 있다.

빛에 의해 눈의 감각기관을 통해 망막에 전달된 시각정보는 동일하다.

A의 뇌는 그것을 '나무' 라는 새로운 매개로 인지하게 만들었고,

B의 뇌는 그것을 '꽃' 이라는 또 다른 매개로 인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해보자.


시각적인 것 뿐 아니라 촉각도 마찬가지다.

역시 A, B 두 사람이 푸딩을 앞에 놓고 손으로 만지며 이야기 한다.

A가 "우와 이 포도 맛있겠는데?"

그러자 B가 대답한다.

"그러게 이 수박 굉장한 걸?"


이 무슨 사오정들의 대화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A가 말한 "포도"라는 단어가 B의 귓 속 달팽이관의 고막에 전달되었을 때 "수박"이라는 단어로 매핑(mapping)이 된다고 생각해보자.

사오정들의 대화가 아니라 우리 감각기관이 마치 통역관처럼 일을 해서 뇌가 착각을 일으키게, 그러나 완벽한 매핑(mapping)으로 사회속에서 질서가 유지되는 완벽한 프로그래밍의 세상과 같은 것이다.


오히려 지금은 설명하기도 벅찰 정도로 스스로도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지만

어릴적 나의 이런 상상은 대학교 학부시절 전공수업 시간에 다시한번 빵! 터진다.

"Machine Language"

이미 학부에 오기 전부터 C, C++에 숙달되어 온 똑똑한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그런 기계어(Machine language)를 접해보지 않아서 매우 생소했는데, 정말 신기했던 것은 사람의 말을 전달하면 어셈블러(assembler)와 컴파일러(compiler)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그것을 0와 1로 구성된 2진 숫자(binary digit)으로 바꾸어 기계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language)로 전환(translate)해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apple"이라는 단어를 던졌을 때 로직에 따라서 빨간 사과그림을 보여줄 수도 있고 노란 바나나 그림을 보여줄 수 도 있다는 뜻이다.



IDEA ; idea

앞서 밝혔던 나의 어린시절 상상들은 거의 망상에 가까웠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 막연한 추측.

마치 픽사의 영화 "토이스토리"처럼 장난감이 말을 하며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은 재밌는 상상이었다.


그런데 철학에 관심없던 내가 최근 우연히 헬라(그리스)의 철학에 대한 짧은 단상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재밌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플라톤의 철학에 "이데아(IDEA)" 라는 개념이었다.

우리가 진짜라고 믿고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부분은 "진짜"로 인해 생긴 그림자일 뿐이며, 실제 존재하는 소위 "진짜"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 따로 존재한다는 개념이다. 플라톤이 들었던 동굴예화를 보면 사람들이 동굴 안에서 빛에 의해 생긴 그림자를 보고 저것이 존재하는 모습이라고 착각하나, 실상 진짜의 모습은 그림자가 아닌 그림자를 생기도록 빛을 차단하는 물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현상들은 실체가 아닌 허상에 불과하며 그것들의 실체는 따로 존재 한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이론이지만, 1999년 개봉한 워쇼스키형제 감독의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에서 재밌게 이데아론이 표현되어 있다. 인간이 진짜라고 믿고 살아가는 세계는 사실 기계에 지배당한 미래에 기계에 의해 뇌에 흘려지는 전기자극과 최면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라는 것이다. 먹는 음식도 실제로 먹는 것은 아니며, 지나가며 만나는 아름다운 여자도 만들어진 가상이라는 것.


There is no spoon.

<영화 'The Matrix' 中  키아누리브스(Neo 役)의 대사>



진짜와 가짜.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믿음과 불신.

이것들에 대한 짧지만 아주 함축적인 대답이다.

이데아가 아닌 가상의 세상에서도 숫가락이 있다고 믿으면 있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나,

그것의 존재를 부정하고 이데아의 존재를 믿는다면 더 이상 스푼은 단단한 쇳덩이가 아닌 것이다.


(현실 왜곡 샷~! 이것이 허상의 실체?!^^;;;)


이데아 사상은 기독교적인 관점과 어느 정도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누리는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

믿음으로 받는 구원.

이것이 성경적인 이데아, 곧 천국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플라톤의 철학에서 이야기 하는 그림자같은 허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본질은 이 곳이 아닌 천국에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때문에 나그네적인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有錢無罪 無錢有罪)?  유전무죄 무전유죄(有傳無罪 無傳有罪)!

The press; 뉴스, 미디어, 보도.

우리는 매일 이들을 통해 사회 현상에 대한 정보를 공급 받는다.

비유하자면 이들은 우리의 감각기관과 같은 역할을 한다.

가급적이면,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현상들을 보고 싶은데, 때로는 사실을 과장하거나 왜곡하여 보도할 때가 있다.

키아누리브스가 구부렸던 Spoon 정도야.. 없다고 생각하고 구부리든, 그게 잘 안되든 크게 중요한 일 아니지만, 언론의 내용에 색이 입혀진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언론에는 다채로운 색이 입혀져 우리의 뇌를, 생각을, 판단을 속이려 하고 있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언론의 이러한 색안경에 대해 대중이 깨닫고, 이에 대해 진실을 알리려는 노력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 이론' 에서는 모두가 그림자를 보며 철썩같이 믿고 있을 때, 누군가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진실을 보게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려한다.

이러한 자를 일컬어 지혜자 혹은 철학자라 하는데 이들은 이웃에게 진리를 전하기를 사명과 같이 여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진실을 알고도 전하지 않는 것은 곧 죄가 된다는 것이다.

비록 대중은 진실을 들어도 자신들이 믿는 허상만을 바라보며 들으려 하지 않겠지만,

사명으로 여기고 진리를 전하라는 것이 플라톤 이데아론의 이야기이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도 "전하는 것"에 대하여 굉장히 중요한 사명으로 여기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명령하는 것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비기독교인을 교회로 과도하게 끌어오는 일에만 몰두하는 일부 변질된 기독교인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반감을 느끼고 거부를 하는 모습이 생겼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
- 마태복음 10:14 -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며 이와같이 말씀하신다고 성경에 기록되어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사명은 "전하는 것"에 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이 하실 영역을 남겨둔채,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essence

본질.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에 대하여 본질을 향한 갈구를 멈춰서는 안된다.

모든 것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라는 것은 아니다.

항상 진리를 꿈꾸고 진리를 향해 끊임없이 조금씩 다가간다면,

결국 진리를 보게 될 것이다.


Oh my GOD! You so beautiful!

<영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中>


항상 이성의 외모만을 진리라고 여겼던 남자 Hal.

하지만 뚱뚱한 "진짜" 그녀의 외모를 보고도 그가 이러한 말을 외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더이상 껍데기에 불과한 사람의 외모가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꼭 기억하자.


(본질은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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