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않았으면 했던 마지막 날이 도래했다. 아침부터 일출을 보러 가고 싶었지만 잠에 빠져 그러지 못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일찍 일어나지 못할 이유는 수만 가지다. 다음 여행에서는 좀 더 부지런해지자, 일출이 잘 보이는 성산일출봉 근처로 숙소를 잡아보자며 새로운 다짐을 세웠다. 인간이란 이렇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그래도 이만하면 훌륭한 혼자 여행이었다 싶다.
이제 3박 4일 동안 정들었던 숙소를 떠나야 한다. 옷가지를 챙기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생각 이상으로 쿨하게 (미련 없이) 체크아웃을 마치고 공항 근처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마지막 날 오전까지도 비가 흩날린다. 하필이면 황금연휴 기간에 비가 오다니 제주도 너도 참 눈치 없다. 머피의 법칙은 이번에도 꼭 들어맞았다.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부터 날씨가 개인 것이다! 공항 쪽부터 개이기 시작하더니 다가오는 월요일부터는 제주도 전체가 맑음이라고 한다. 아쉬움 반, 이런 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라는 긍정적인 마음 반으로 제주도를 떠난다.
마지막으로 먹은 건 보말 칼국수였다. 한림 칼국수라는 곳에서 보말 칼국수와 매생이보말전을 먹었는데, 혼자 여행자에게는 많은 양이었지만 한 번에 맛난 음식을 두 가지나 맛봤으니 후회는 없다. 5월 초부터 식이 조절을 하면서 먹는 양이 많이 줄었다. 그리고 먹고 나서는 꼭 몸을 움직여줘야 속이 편하다. 이건 단순 식이 조절을 떠나 몸이 늙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현상이다. 슬프다!
푸짐한 아침 식사 후, 땅땅해진 배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기 위해 한 시간 남짓 공항까지 걷기로 했다. 어떻게 보면 진짜 무모한 일이다. 공항까지 가는 버스는 수두룩하고 그냥 그대로 공항으로 간다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15분 만에 도착할 테니까. 하지만 나는 나의 무모함을 믿기로 했다. 일단 저지르고 하서 해냈을 때 뿌듯하다면 그것이 무모한 시도이든 뭐든 행복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매 순간 행복하기만 바라는 것도 병이라 했다.)
여하튼 나는 한 시간 넘는 거리를 꼬박 걸었고, 가다가 스타벅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벤티 사이즈로 한 컵 테이크 아웃하기도 했다. 맨날 먹는 메뉴인데 아직까지 질리지도 않는다. 그렇게 아무도 걷지 않는 긴 거리를 혼자 걸었다. 그냥 걷기만 했으면 모양새가 좀 더 나았을지 모르겠다. 나는 덜덜거리는 캐리어와 함께라 모르는 사람이 보았으면 쟤는 도대체 어딜 가는 걸까 갸우뚱했을지도 모르겠다. 무사히 공항에 도착해 항공권 체크인과 수하물 수속까지 마치고 나니 한 시간이 남았다. 다음 여행부터는 무조건 늦은 오후로 비행시간을 잡으리라. 차라리 저녁 시간으로 잡는 것도 좋았겠다. 애매하게 1시 비행기를 잡았더니 집에 가는 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공항으로만 오게 되어 아쉬웠다. 아, 이건 뚜벅이에게 한정되는 이야기다! 제주에서 차가 있다는 것은 곧 시간 절약을 뜻한다. 매일 결심만 하고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 중에 '운전 연습'이 있는데, 이번 여행을 계기로 용기를 내 운전 연수도 받아보고 싶다. (그래놓고 아직도 운전 연수를 받지 않았다. 이 글을 퇴고하는 지금은 2019년 10월이다.)
서울행 비행기가 떴다. 혼자서 했던 몇 안 되는 여행 중 가장 알찬 여행이었다. 물론 여행을 했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갖고 있던 문제들이 해결된 것은 절대 아니다. 다가오는 월요일부터는 쳇바퀴처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가고, 엄청난 업무량에 시달리다 퇴근을 하고, 다시 집에 와 운동을 하거나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다 잠에 들겠지. 주말에는 친구를 만날 수도 있겠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지치고 힘들 때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는 것이다. 다가오는 가을에는 어디로, 내년에는 어디로 여행을 가야지 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바뀌는 것은 없지만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음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생각은 인간관계의 틀은 내가 규정하기 나름이라는 것. 나의 생각에 따라 사람들에게 얻을 수 있는 가치는 더욱 다양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