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내가 했던 것들
1화. 욕심이 부른 완벽주의
어느 날, 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에서 나 자신이 가장 작아 보이는 날. 그 날은 내가 한없이 울적해질 수 있는 날이다. 그럴 때면 으레 나는 이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우울인지 출처를 더듬어보곤 하는데, 예외 없이 그 원인은 꼭, 내 안에 담겨있다. 나는 태어나길 원체 우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일까?
그러고 보면 나의 우울함은 줄곧 나에게서 비롯되었다.
학창시절의 우울은 온통 성적과 교우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보다 심각한 이유가 없었던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별탈 없이 유지하던 성적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발목을 잡았고, 교우관계 역시 생각지 못한 곳에서 속을 썩였다. 돌아보면 그땐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온 세상이 불만이었고 나에게 등을 돌린 것만 같았다. ‘내 편이 있긴 한걸까?’ 우울함의 끝에서 끝내 나는 예민하고 짜증스러운 아이가 되어 있었다. 우울과 외로움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라, 그것은 곧 나의 가장 큰 치부가 되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매일 같이 야자시간에 강의를 들었고, 문제를 풀었고, 정답을 맞추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열심히는 했지만 잘 하는 요령이 부족했던 것 같다. 잔인하지만 공부에도 선천적인 머리가 있다고들 하지 않는가. 나에겐 선천적인 공부 머리가 없었던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꼴에, 공부 잘하는 아이 타이틀은 놓을 수 없었는지 외고라는 보기 좋은 포장지에 싸여 ‘공부 잘하는 아이’로 3년을 살았다. 우여곡절 끝에 22살 편입시험에 합격하기 전까지 연이은 입시 실패는 우울과 무기력함의 오랜 원천이 되었다. 그전까진 대학에 들어가면 다 좋아질거란 막연한 희망에 몸을 기댈 수야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조차도 먼 꿈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막연하고 답답했다. 수능에 미끄러진 나는 생각지도 못한 어느 대학에 입학했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비웃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되지도 않는 피해의식이 생긴 것이다. 모든 게 나라는 인간에서 비롯된 악습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우울한 감정을 어떻게든 극복해보려 선택한 것은 자기합리화였다.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어라던지, 이까짓 거 안 해도 그만이야라던지, 그럴싸한 핑계로 나를 위로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갈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겹게도 자기합리화 했다. 자기 합리화는 순간적으로 우울한 감정을 삭히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따위 것들에 우울했던 내가 미워 스스로를 다그치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나중엔, 이따위 변명만 늘어놓을 줄 아는 내가 치졸해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더욱더 깊은 우울이 찾아왔다. 속상해서 화가 나고 자꾸만 우울해졌다.
우울함은 스스로를 옭아매는 악한 감정이다. 마주치면 마주칠수록 내 안의 골을 더욱 깊어지고 그러다 나중엔 내가 왜 우울했는지 명확한 원인을 찾아내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경험의 능력치로 볼 땐 엄연한 타인인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어느 순간의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울함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하고 기생하는 것이 나라는 사람의 징그러운 습성임을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한다. 조금이라도 덜 힘들기 위해 나는 누구보다 잘 해내야 한다는 것도 말이다. 그래야만 만족할 줄 아는 자기애적인 인간이라는 것도.
우울은 아주 강력한 것이라서 잠깐의 여파로도 아주 손쉽게 정신과 육체를 잡아 비튼다. 짧게는 몇 시간을, 길게는 몇 달을 괴롭히니까. 영원히 떼어낼 수 없다면 그 감정이 감성이 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더 노력해보고 싶다.
2화. 길가의 돌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주말에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다. 평일에 못 본 예능을 주말에 몰아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바로 나다. 넷플릭스에 나온 최신 드라마를 주말 동안 정주행 하는 사람도 나고. 뭐든 잘하고 싶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사람도 바로 나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한심한 건 아니다. 월화수목금 하루 9시간씩, 매일 출근해서 56시간을 일하는데, 주말 48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은 아니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렇듯 일말의 양심이 나를 부추긴다. 너 정말 계속 그렇게 살 거야?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넘기다 보면 부지런한 사람들이 참 많다. 누구보다 빠르게 핫플레이스에 다녀오는 친구들, 맛있는 음식과 엊그제 개봉한 영화를 섭렵한 사람들. 어느새 영상을 업로드한 유튜버들과 오늘도 글을 남기는 파워 블로거들, 새로운 영화를 촬영하며 커피차 인증샷을 올리는 유명 연예인들까지. 그런 사람들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아, 나도 하고는 싶은데 날도 춥고 전염병도 극성이네. 주말도 다 갔고 지금 씻기도 귀찮고, 그러니 이번 주말은 말고 다음 주에나 한번 해볼까?
그리고 정말 그 주 주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고 그런 주말이 또 다시 반복된다. 이쯤되면 게으르다고 욕먹어도 할 말은 없다. 허울 좋게 늙어가는 ‘게으른 완벽주의자’. 무엇으로 포장하든 나는 핑계쟁이일 뿐이다. 으악. 지금 이순간도 스멀스멀 죄책감이 몰려온다.
차라리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돌이고 싶다. 가만히 있어도 눈치 보이지 않는 그런 돌. 그렇지만 그러한 돌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걸까? (과연)
3화. 한 달에 한 번 손톱 바꾸기
그런 나에게도 꾸준함은 있었다.
2018년부터 꾸준하게 한 달에 한 번씩 네일을 받고 있다. 빼먹은 달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주변에선 한 달에 한 번씩 꼭 바뀌는 내 네일아트를 보며 참 부지런하다고 한다. 난 그럴 때마다 속으로 머쓱해진다.
"그냥 회원권 끊어서 매달 가는 건데요...“
이번 1월에 네일샵에 갔을 때는 세상 처음으로 손톱 칭찬도 받았다. 어릴 때부터 지독하게 손톱을 뜯어왔던지라, 하루도 손톱이 멀쩡할 날이 없었는데 젤 네일만 하면 이상하게 손톱을 뜯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 달에 한 번 네일샵을 찾았던 것 같다. 그즈음 나에게 잘 맞는 네일샵을 만났던 것도 신의 한 수였다. (잘 맞는 네일샵에 가면 매달 젤 네일을 받아도 손톱이 쉽게 망가지지 않는다. 선생님의 기술과 네일 용품의 퀄리티, 내 손톱의 컨디션, 삼박자가 잘 맞아야 한다.) 그렇게 꾸준히 네일아트를 받다 보니 자연스레 손톱이 길고 예뻐져, 손톱이 짧을 땐 엄두도 못 냈던 예쁜 아트도 신나게 받아볼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쉐입도 자유자재로 잡는다. 어느 날은 스퀘어로, 어느 날은 또 동그랗게. 쌤은 나처럼 이렇게 꾸준하게 아트를 받는 사람도 잘 없다고 했다. 더구나 지하철로 왕복 두 시간 거리를 매달 왔으니 참 대단하기도 하지. 뜻밖의 칭찬에 "제가 이거라도 꾸준히 하네요. 뿌듯합니다." 대답해놓고도 아차 싶었다. 와, 나도 이렇게 꾸준히 하는 게 있었구나! 갑자기 내가 자랑스러워진다.
그래, 이것도 이렇게 꾸준히 하는데 다른 건 못할게 뭐람? 다른 것도 꾸준히 해보자.
갑자기 없던 열정이 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