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빅토리아
캐나다 밴쿠버에서 출발한 페리는 약 1시간을 달려 빅토리아에 도착했다. 나는 빨리 내리고 싶은 마음에 짐을 들고 하선을 서둘렀다. 일등으로 배에서 내려 빅토리아 다운타운으로 들어가는 2층 버스에 올랐다. 2층 맨 앞자리를 잡은 나는 버스가 출발하기 전까지 두근대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창밖으로는 끊임없이 초록색의 산들이 보였다. 그 풍경만으로도 10년 만에 다시 온 빅토리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한참을 달린 버스가 점점 나의 목적지인 엠프레스 호텔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이너 하버에 위치한 그 호텔은 빅토리아의 랜드마크였다. 내가 엠프레스 호텔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2006년 밴쿠버 어학연수를 준비하면서부터였다. 아름다운 이너하버와 엠프레스호텔이 같이 찍힌 사진을 봤는데 고풍스러운 성 같이 생긴 호텔의 모습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밴쿠버에 가게 되면 꼭 저기서 숙박해야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대학생 신분으로 떠났던 빅토리아 여행에서 엠프레스 호텔은 내가 머물기에는 너무 비싼 곳이었다. 나는 8명이 함께 쓰는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며, 캐리어를 끌고 그 호텔에 들어가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나는 그 사람들이 무척 부러웠다.
비록 엠프레스 호텔에서 숙박을 하지 못했지만 빅토리아 여행은 꿈만 같았다. 한 여름밤 이너하버에서 열린 선상 음악회는 무심코 그 옆을 지나가던 나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아름다운 선율과 시원한 여름밤의 바람. 빛을 받아 반짝이던 윤슬. 옆에 있는 사람들이 영어로 대화하는 목소리마저도 나에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름다웠던 그 밤, 그 온도와 분위기를 잊지 못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원 된 나는 오랫동안 빅토리아를 그리워했다. 언젠가 다시 꼭 빅토리아에 가서 엠프레스 호텔에 머물며 여행을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회사를 다니며 힘들 때마다 파티션에 붙여둔 빅토리아 사진을 봤다. ‘내가 꼭 가고 마리라!’ 굳은 다짐을 하며 10년을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대망의 2016년 나는 다시 캐나다로 향했다.
십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버스를 타고 달려온 나는 엠프레스 호텔 한 정거장 앞에서 내렸다. 코 앞에 호텔의 뒷모습이 보였다. 길을 따라 걷다가 오른쪽으로 코너를 돌면 이너하버와 함께 담쟁이덩굴이 가득한 호텔의 앞모습이 보일 것이다.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주황색 짐가방을 꽉 쥐었다. 휴- 깊은 숨을 한번 내쉰 뒤 사뿐사뿐 걸어가기 시작했다. 날씨마저 완벽한 9월 어느 날의 오전, 나는 드디어 10년 만에 꿈을 이루러 가는 길이었다.
살금살금 코너를 돌자 드디어 눈부시게 푸른 하늘과 바다가 보였다. 아름다운 이너하버의 풍경은 10년 전과 다름이 없었다. 아니 더 아름다워졌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니 그토록 가고 싶었던 엠프레스 호텔이 보였다. 내가, 드디어, 오늘, 이 호텔에 투숙객으로 왔다. 나는 한참 동안 호텔을 바라보다가 로비로 들어갔다. 십 년 전엔 호텔 앞에서 사진만 찍고 갔는데 이 호텔에서 잠을 자게 됐다니. 거짓말 조금 보태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체크인 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나는 짐을 맡기고 밖으로 나왔다. 십 년 전 사진을 찍었던 그곳으로 갔다.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이 벅차올랐고 계속 웃음이 나왔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10년 동안 회사일이 힘들 때마다 빅토리아 여행을 하는 나를 떠올리며 견뎠다. 캐나다로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이 순간만을 그려왔다.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빅토리아. 엠프레스 호텔 앞에 서 있다니.
나는 지금 이 순간이 믿기지 않았다. 10년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사진을 찍고 나서 2층 버스를 타고 빅토리아를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10년 전에는 비싼 2층 버스도 못 타보고 갔는데 이번엔 빅토리아를 제대로 즐겨볼 생각이었다. 2층 버스에 앉아 출발을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고 파란 하늘, 시원한 바닷바람, 따사로운 햇살. 눈부시게 예쁜 빅토리아의 건물과 풍경들. 버스가 출발하고 나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묶을 새도 없이 빅토리아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버스는 한 시간이 넘게 달려 다시 이너하버로 돌아오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엠프레스 호텔이 나에게 말했 다. “어서 와.” 드디어 호텔에 체크인할 시간이다. 이제 늘 꿈꾸던 곳으로 들어간다. 체크인을 하고 객실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창 밖으로 이너하버가 보인다. 오랜 꿈이 이뤄진 오늘,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