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내가 엄마의 무릎이 되어줄게요

엄마의 무릎베개

by 송이


어릴 적 나는 엄마의 무릎에 누워서 책 읽어주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엄마의 무릎에 누우면 엄마는 내 머리를 살살 넘겨주며 전래동화책을 읽어주시고는 했는데,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스르륵 눈이 감겨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폭신한 베개보다 더 편한 엄마 무릎은 세상에서 가장 낮지만 가장 높은 자리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엄마의 무릎에서 곧잘 잠이 들었다. 엄마의 살냄새를 맡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비켜 내가 누울 거야!”
“누나가 비켜 내 차례야!”

밤이 되면 동생과 나는 엄마 무릎 쟁탈전을 벌였다. 내가 엄마 다리를 베고 누워 있으면 동생이 달려와 나를 발로 차며 비키라고 했다. 엄마 무릎은 자기 거라며 누나는 이제 일어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도 엄마 다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나와 동생이 싸우면 엄마는 싸우지 말라며 우리에게 무릎을 한쪽씩 내어주셨다. 우리는 엄마 다리에 나란히 누워 엄마가 읽어주시는 동화책을 감상했다. 나와 동생이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초등학교 시절 어느 여름날, 그날도 나는 마루에서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달달달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에서는 오래된 철 냄새와 바람에 실린 여름 습기가 함께 흘러나왔다. 그 바람이 내 뺨을 스치면 간질간질했는데, 그 옆에서 엄마는 내 배를 둥글게 쓰다듬으며 “밥은 잘 소화됐나 보네” 하고 중얼거리셨다. 그 부드러운 손길은 파도처럼 잔잔해져서, 나는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내다가 어느 순간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앉았다.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났는데 여전히 엄마의 다리를 베고 있었다. 잠에서 깬 내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자, 엄마는 그제야 다리를 쭉 펴고 다리를 팡팡 두드리셨다. 어린 날의 나는 다리가 저려도 나를 깨우지 않았던 엄마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

사춘기 시절, 엄마 무릎 대신 라디오를 베고 잠들던 날들이 이어졌다. 엄마의 손길이 괜히 거슬릴 때도 있었다. 어린 마음엔 자유롭고 싶다는 욕심이 더 앞섰다. 나는 점점 엄마의 품을 떠났고, 대신 엄마의 무릎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있었다. 엄마 다리를 베고 잠자던 작은 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완전한 성인이 되었다. 내가 커가는 동안 엄마도 나이가 들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시는 엄마는 자주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무릎이 너무 아프다며 쪼그려 앉는 것도 하지 못했다. 튼튼했던 엄마의 다리는 연골이 닳고 관절염이 생겼다. 조금만 걸어도 무릎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엄마, 병원에서 수술하라잖아. 수술하자.”
“괜찮아. 수술까지는 안 해도 돼.”
“더 아프면 못 걸어 다녀.”

이상하게 수술을 완강히 거부하던 엄마는 계속된 나의 설득으로 수술을 결심했다. 양쪽 무릎을 다 수술해야 해서 엄마는 겁이 났다고 했다. 그래도 수술해서 나아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냐고 엄마를 다독였다. 튼튼했던 엄마의 다리에 수술 흉터가 생겼다. 수술을 마친 엄마의 무릎에는 긴 선이 굽이굽이 그려져 있었다. 꿰맨 자국이 굵은 실로 이어 붙인 천 조각 같았고, 옅은 붉은빛이 아직 남아 있었다. 어린 시절 우리가 무심히 베고 누웠던 그 무릎에 이제는 마치 삶의 지도를 새겨놓은 듯 길게 남은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동안 내가 병원에 함께 있었는데 엄마는 이제 예전처럼 산에 가지 못할 것 같다고 하며 속상해하셨다. 속상해하는 엄마를 보니 내 마음도 바늘이 쿡쿡 쑤시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회복실 침대에 누운 엄마는 무릎에 얼음찜질을 얹고도 얼굴을 찡그리셨다. 밤이 되면 통증이 더 심해져서, 엄마는 가만히 이를 악물며 이마에 땀을 맺히곤 했다. 내가 물컵을 들어드리면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나아” 하고 웃어 보이셨지만, 그 웃음 속에는 말하지 못한 고통이 숨어 있었다. 간호사가 와서 무릎을 조금만 구부려 보라고 하면, 엄마는 손수건을 꼬옥 움켜쥔 채 애써 참으며 천천히 다리를 움직였다. 그때마다 내 손은 엄마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정작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엄마는 퇴원 후 재활치료를 열심히 받았다. 예전만큼 다시 건강해지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튼튼한 다리로 돌아가고 싶으신 모양이었다. 무릎을 구부리는 것조차 아파하시면서도 엄마는 열심히 재활 운동을 하셨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릴 때 엄마의 무릎에 누워 동화책을 감상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우리가 엄마 무릎에 너무 많이 누워서 엄마 다리가 아픈 게 아닐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그날 밤 엄마 다리를 찜질해 주며 엄마의 무릎을 살살 만져보았다. 나와 동생을 위해 아낌없이 내주던 무릎에 이제는 흉한 상처가 생겼다. 이젠 엄마의 무릎에 눕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시큰한 눈물이 차올랐다. 아프고 저릴 텐데도 아무 말 없이 기꺼이 우리를 위해 내주던 엄마의 무릎. 우리의 안식처였던 엄마의 무릎이 이제는 고장이 나버렸다.

“엄마 내 무릎에 누워봐.”

늘 내게 무릎을 내어주던 엄마가 처음으로 내 다리를 베고 누우셨다. 엄마의 흰머리가 내 무릎 위에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따뜻한 체온이 천천히 전해졌다. “이상하다, 네 무릎이 참 편하다” 하며 엄마는 살짝 웃으셨다. 그 웃음은 오래전 내가 잠들던 여름밤의 자장가 같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제는 내가 엄마의 무릎이 되어, 지친 엄마를 토닥이며 쉬게 해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엄마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쉬셨다. 그 고요한 숨결이 내 다리를 타고 전해졌다. 그 순간, 나는 진짜로 엄마의 무릎이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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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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