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 아빠

아빠와의 이별준비

by 송이


위암으로 3년을 투병하신 아빠가 돌아가신 그날, 나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가장 먼저 장롱 속 영정사진을 챙겼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2주 전, 병원에서는 이제 더 이상 아빠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며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콱 박혔다. 날카로운 칼날로 심장을 후벼 파는 듯 너무 아팠지만 아빠와의 이별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나는 조용히 아빠의 영정사진을 준비했다.

아빠는 평소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젊고 건강했던 시절에도 사진을 잘 찍지 않으셨고 아프고 나서는 더 그랬다. 그래서 아빠의 영정사진으로 마땅히 쓸만한 사진이 없었다. 몇 장 없는 사진을 추리던 중 나는 평소 지갑에 넣고 다니던 아빠의 증명사진을 꺼내 보았다.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인 아빠가 40대에 찍은 사진이라 그런지 사진 속 아빠는 젊고 건강해 보였다. 나는 그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동생의 차로 30분을 달려 시내의 사진관에 갔다. 아빠의 증명사진을 내밀며 영정사진으로 쓸 거라고 말하자 주인아저씨는 조심스레 액자를 골라보라고 하셨다. 나는 가장 단정하고 깔끔해 보이는 액자를 골랐다. 잠시 후, 작았던 증명사진은 A4 크기로 확대되어 액자에 담겨 내 손에 건네졌다. 그 사진을 품에 안았을 때야, 내가 직접 아빠의 영정사진을 준비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사실이 가슴 깊이 와닿았다. 그때 나는 겨우 스물일곱이었다.

동생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아빠의 사진을 안은 채 나는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눈물이 비집고 나오려는 걸 참았지만 아빠를 보내기 위한 준비들이 하나둘 현실이 되어가는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왜 아빠가 아프셔야 했을까', '왜 하늘은 아빠를 데려가려 하는 걸까' 수없이 되뇌었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침묵뿐이었다. 믿지도 않는 신이 미웠고,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집에 돌아온 나는 사진을 곱게 보자기에 싸 장롱 가장 깊숙한 곳에 넣었다. 그 액자를 꺼낼 날이 절대 오지 않기를, 숨죽여 기도했다.

그러나 야속한 그날은 곧 찾아왔다. 며칠 뒤, 아빠는 가족 곁에서 마지막 숨을 고이 내쉬셨다. 엄마의 울음소리, 구급차를 부르던 이모의 다급한 목소리. 정신없는 와중에도 나는 차분히 옷을 챙겨 입고, 장롱에서 아빠의 사진을 꺼냈다. 장례가 끝날 때까지 다시는 집에 오지 못할 것 같아 정신을 다잡고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챙겼다. 이상하리만큼 덤덤하게 영정사진을 꺼내든 내 모습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준비했던 아빠의 사진은 곧 빈소에 놓였다. 상복을 입고 조문객들을 맞으며 사진 속 아빠를 바라보는 순간, 아빠가 정말 떠났다는 현실이 가슴을 덮쳤다. 그전까지는 울지 않았던 나였지만, 눈물이 왈칵 터져버렸다. 내가 직접 준비해 온 아빠의 영정사진 앞에서. 항상 지갑에 간직하던 그 소중한 사진이, 아빠의 마지막 얼굴이 되어버렸다. 검은 띠 두 줄을 두른 아빠의 얼굴이 내 마음을 산산이 무너뜨렸다.

아빠가 떠난 후, 나는 가끔 휴대폰 속 아빠의 사진을 꺼내 본다. 병마와 싸우시던 말기, 너무 마르고 황달로 얼굴과 손까지 노랗게 변한 그 사진. 볼 때마다 내 손발이 모두 찢어진 것처럼 아팠다. 왜 건강하실 때 더 많은 사진을 찍어두지 않았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아직도 아빠가 너무 보고 싶은데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게 참 속상하다.

아빠가 떠난 지 어느덧 16년. 스물일곱이었던 나는 이제 사십 대가 되었다. 아빠의 제사 때마다 꺼내는 영정사진 속 아빠는 아직도 젊고 건강하다.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 아빠. 영원히 정지된 시간 속에 머무는, 나의 아빠.

이제 나는 사진 속 아빠의 나이를 향해 가고 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 때마다 슬픔들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다. 더 이상 아빠를 그리워하며 슬퍼하지만은 않는다. 아빠가 건강했을 때나 아프셨을 때조 나에게 똑같이 주었던 사랑을 기억하며 아빠를 추억한다. 오늘도 내 지갑 속에선 아빠가 함께 하고 있다.



나는 그저 바란다. 그 영원히 젊고 건강한 사진 속 아빠처럼, 시간이 멈춘 그 자리에서 아프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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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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