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와 집안일, 바쁜 시간을 쪼개서 즐기던 취미생활까지. 나를 너무 혹사시켰는지 번아웃이 왔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맞춰 움직이며, 시계 추 같이 움직이는 삶. ‘이게 과연 잘 사는 걸까?’ 어느 순간 그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몸은 무겁고 마음은 공허했다. 나는 무얼 위해 이렇게 바쁘게 살아온 걸까.
갑자기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회사도 가기 싫고 집안일도, 취미 활동도 모든 게 다 귀찮았다. 그저 쉬고 싶었다. 회사에 하루 휴가를 내고 늦게까지 낮잠을 잤다. 늦은 아침을 먹고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내가 쉴 곳이 필요했다. 커피를 마시러 카페로 걸어가다가 동네 공원 옆에 있는 작은 숲이 생이 생각났다. 갑자기 마음이 숲을 향했다. 아무것도 하지 많고 그저 걷고 싶었다.
숲 입구에 들어서자 시원한 바람이 뺨을 스쳐 갔다. 고요한 바람 소리, 나무와 흙 내음,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그동안 너무 오랜 시간 눈과 귀를 닫고 살았던 건 아닐까 싶었다. 나는 무심히 발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습관처럼 빠르게 걸었다. 뭔가 목적지를 향해 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 그러다 문득 멈춰 섰다. '지금 왜 이렇게 서두르고 있지?' 그렇게 다시 발을 떼는데, 이번엔 조금 느려졌다. 숨도 고르고,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숲 속의 시간은 바깥세상과는 전혀 달랐다. 여기서는 계절이 한 겹, 또 한 겹 쌓여가며 천천히 숨 쉬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에도 이야기와 역사가 담겨 있었고, 그 오래된 생명들의 리듬에 나도 조금씩 맞춰져 가는 듯했다. 시간은 더 이상 내가 조급하게 쫓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스며들어 함께 흐르는 무언가가 되었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의 결을 보고, 풀숲 사이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개미들을 관찰했다. 나무줄기를 타고 오르는 햇빛과 그늘, 흔들리는 나뭇잎 그림자를 눈에 담았다. 그 모든 것이 나보다 훨씬 느린 리듬으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안에는 분명한 생명감이 있었다.
그 느림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더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다. 숨 가쁘게 달려온 내 삶의 궤적들이 어느새 조용히 내려앉았고, 마음 한편 깊은 곳에서 잊고 있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났다. 기쁨도, 슬픔도, 희망도 그곳에 함께 있었다. 숲은 내게 말없이 ‘괜찮다’고, ‘그대로 있어도 된다’고 속삭였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삶의 진짜 의미는 속도가 아니라, 그 안에서 나누는 온기와 평화라는 것을.
숲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은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 어디에도 해야 할 일은 없었고, 누구도 나에게 ‘빨리 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너무 빠르게 살아왔다는 것을. 하루하루를 살아내느라, 정작 살아 있다는 감각은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에서는 늘 일을 빨리 처리해야 했다. 밀려오는 공문과 업무들. 한시라도 늦으면 독촉 전화가 왔다. 십여 년 넘게 ‘빨리빨리’의 리듬에 맞춰 살아오다 보니, 집안일도 멈추지 않고 계속하게 됐다. 잠시라도 쉴 틈이 생기면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여러 취미를 억지로 만들고 또 바쁘게 살았다.
그러는 사이, 내 마음과 몸은 천천히 곪아갔다. 매일 머리가 아팠고, 일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휴일조차 나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조금씩 나에게 쉼을 주며 살아왔어야 했는데, 나는 나를 너무 극한으로 몰고 있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말이다.
잠시 앉아 눈을 감았다.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나뭇잎 사이로 새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평화로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날의 숲은 나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너는 그냥 있어도 괜찮아. 천천히 살아도 괜찮아.”
그날 이후로 나는 자주 숲을 찾는다. 빠르게 살아야만 살아있는 게 아니라는 걸, 숲이 조용히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숲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를 회복하고 있다.
삶은 결국 나만의 속도로 걸어가는 여정임을 숲이 가르쳐주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쫓아야만 하는 삶이 아닌, 나 자신과 조용히 마주하는 시간들. 그 시간들이 모여 내 삶을 조금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느리게 걷는 숲의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 나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