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다시 미어캣이 된다.
나의 별명은 ‘민원실의 미어캣‘이었다. 인사이동 있기 전까지 3년을 시청 민원실에서 근무했는데 그때 동료들은 나를 미어캣이라고 불렀다. 유난히 긴 허리로 앉은키가 컸던 나는 머리가 파티션 위로 쑥 나와있었다. 직사각형의 민원실 한 꼭짓점에 앉은 나는 미어캣처럼 목을 쑥 내밀고 사무실 이곳저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살펴보곤 했었다. 그러다 도움이 필요한 곳이 생기면 살금살금 걸어가서 도움을 주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동료들의 말에 의하면 나는 피에 ’ 친절‘이 흐르는 사람이었다.
“너는 참 친절해”
2년이 넘게 같이 일했던 민원 팀장님이 자주 하신 말씀이었다. 나는 내 업무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다른 팀이 바쁠 때, 특히 내 바로 옆의 여권팀이 바쁠 때 민원실 앞으로 나가 적극적으로 도왔다. 민원인이 여권 신청 서류 쓰는 걸 돕기도 하고 번호표 순서가 엉켰을 땐 교통정리도 해주었다. 여권팀 직원들은 나를 제2의 여권팀이라고 부르며 늘 고맙다고 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게 좋았고 나로 인해 누군가가 도움을 받으면 그게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내가 일하고 있을 때 가끔 민원인들이 고맙다며 박카스를 한 박스 사다 주시기도 했다. 또 칭찬글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기도 하셨다. 나는 일을 잘하면서도 친절하려고 항상 노력했다.
우리 회사에서는 1년에 두 번 전화 친절도 조사를 한다. 한 달 동안 진행되는 이 조사는 민원인을 가장한 조사자가 어느 날 갑자기 전화를 걸어 직원들과 업무에 관한 통화를 한다. 그리고 조사자가 대화를 하며 느낀 직원의 친절 점수를 매긴다. 나는 이 조사를 시작하면 바짝 긴장하며 다른 때보다 더 친절하게 전화받으려고 노력했다.
민원실에 있을 때 나의 전화 친절도 점수는 언제나 95점 이상이었다. 그 점수가 꼭 나의 친절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친절이 피에 흐르는 나는 그 점수로 만족할 수 없었다. 다음 조사에는 꼭 100점 받도록 노력해야지 하며 열의를 다졌다.
그런데 7월 인사이동 후,
9월에 진행된 전화 친절도 조사에서
나는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88점이라는 점수를 받았다.
점수는 상위 15명만 이름이 공개되고 나머지는 익명이다. 하지만 각각의 질문으로 누구의 업무인지 추측할 수가 있다. 내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지만 나는 88점이라는 점수가 너무 부끄러웠다. 친절도 조사 기간에 정말 최선을 다해서 전화를 받았는데 88점이라니? 내 친절이 88점이라니! 전화 한 통으로 나의 친절의 점수를 다 매길 수는 없겠지만 이상하게 88점이 내 친절의 모든 점수인 것처럼 다가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 이게 조사 전화였구나’ 하고 느껴지는 전화가 한 통 있었다. 내 업무의 아주 기본적인 절차를 묻는 전화였는데 형식적인 질문들을 계속했다. 그때 나는 새 부서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업무 숙지가 잘 안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기본적인 절차도 버벅대며 대답했었다. 아마 그때 그 전화가 나의 친절도에 88점을 준 것 같았다. 물론 그 전화가 미스터리 콜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엑셀에 빼곡히 적힌 점수들 중 나의 88점이 유난히 크게 보였다. 나는 왜 유독 88점이라는 점수가 신경 쓰였던 걸까? 평균에 미치지 못한 점수여서? 아니면 남들이 보는 내 친절이 88점으로 보일까 봐 걱정이 돼서였을까?
수많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의 친절은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친절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노력의 결과일까. 그래서 88점이라는 점수에 목을 매는 것인지 고민되었다. 민원실의 미어캣 시절 내 친절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이었나. 근본적으로 나의 행동들은 과연 진실된 친절이었는지부터 의심되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내 친절은 88점이라는 숫자에 갇혀 있었다. 낮은 점수를 어깨에 얹고 축 늘어진 슬픈 미어캣. 88점에 흔들린 나의 마음을 나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사람들을 돕고 베푸는 게 좋다. 보이지 않는 전화 속 나의 친절이 미흡했다면 앞으로는 더 친절하고 정확하게 답변하면 된다. 후회해도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 이제부터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 부서 출입문 바로 앞에 앉는 나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응대하고, 전화를 받는다. 추운 날 먼 길을 달려온 민원인에게 건네는 따뜻한 쌍화탕 한 병처럼, 늘 따뜻한 마음으로 민원인을 응대해야지. 다시 부지런한 미어캣이 되어 숫자에 내 친절을 가두지 말아야겠다.
스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또 미어캣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