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은 결국 내 삶의 선택들과 함께 흘러가는 일
“저 팬싸 당첨자인데 오늘 참여를 못할 것 같아요.”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고작 팬사인회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올겨울 가장 간절했던 낭만의 한 페이지 었으니까.
2019년 2월 14일. 그날은 WANT로 컴백한 태민이의 팬사인회가 있는 날이었다. 밸런타인데이에 하는 팬싸인 만큼 태민이가 초콜릿을 나눠 준다고 했다. 게다가 장소는 한강의 어느 크루즈였다. ‘너무 낭만적이다’라는 생각에 이 팬싸만큼은 꼭 참여하고 싶었다. 그래서 앨범을 아주 많이 사서 당첨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며칠 전 병원에 입원하신 엄마의 무릎 수술이 사인회 날로 잡혔다. 이미 사인회에 많은 돈을 들여 당첨이 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사실 이런 고민을 하는 것조차 불효인걸 알았지만 태민이의 크루즈 팬싸는 꼭 가고 싶었다. 다행히 엄마는 간단한 수술이니 혼자 있을 수 있다며 오후에 잠깐 팬사인회에 다녀오라고 하셨다.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나는 잠깐이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팬싸 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수술을 마치고 나온 엄마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양쪽 무릎을 동시에 수술해서 혼자서는 거동조차 힘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통증이 심해 너무 힘들어하는 엄마를 두고 차마 태민이를 보러 갈 수 없었다. 속상했지만 엄마가 더 중요했기에 나는 사인회 참석을 포기했다. 태민이를 만나러 간다는 기대감에 얼마나 행복했는데... 친구에게 사인회에 못 간다는 말을 전하는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화장실 칸막이 안에서 소리를 죽여 한참을 울었다. 그 눈물은 태민이를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이기도 했고, 그 와중에 엄마보다 팬싸를 먼저 떠올린 나 자신에 대한 미안함이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사인회에 못 가면 싸인 앨범이라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 주최 측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 상담사가 내용을 담당 부서에 전해준다고 했고 잠시 뒤, 내 이름으로 앨범에 사인을 해서 보내주겠다는 답변이 왔다. 태민이를 직접 보고 사인을 받았으면 좋았겠지만 싸인 앨범이라도 받을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그날 밤 나는 팬싸 후기를 보며 또 한 번 울었다.
그리고 5일 뒤, 사무실로 작은 택배 하나가 왔다. 팬싸 주최 측에서 보낸 싸인 씨디였다. 조심스레 택배를 뜯자 원트 앨범과 사인회 날 태민이가 나눠준 초콜릿이 들어 있었다. 솔직히 초코는 못 받을 줄 알았는데 초코를 보자 가슴이 뭉클해지고 코끝이 찡해졌다. 재빨리 앨범을 열어보자 태민이의 사인과 멘트가 보였다.
[많이 다치신 거 아니죠?ㅠㅠ 얼른 나으세요.]
태민이는 내가 다쳐서 병원이라고 전달받았나 보다. 얼른 나으라는 태민이의 메시지를 내가 다친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보다, 나의 불효 섞인 갈등을 태민이의 다정한 오해가 다독여주는 것만 같아 눈물이 났다.
태민이가 너무 보고 싶었다.
다행히 3일 뒤에 열린 팬사인회에 당첨돼 태민이를 볼 수 있었다. 나는 택배로 받았던 크루즈 팬싸 초코를 가져가 태민이에게 주고 다시 건네받아 결국 태민이에게 초코를 받는 귀여운 사심을 챙겼다. 그 초코를 나는 애지중지 간직하다가 맛있게 먹었고, 포장지는 지금까지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초콜릿 포장지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 안에 담긴 마음이 아직도 선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마음 한켠이 저릿하다. 태민이를 보지 못한 아쉬움과 엄마 곁을 지켰다는 안도감이 함께 남아 있다. 크루즈 팬싸에 가지 못한 건 분명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 선택 덕분에 팬으로서의 마음도, 딸로서의 마음도 모두 진심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받은 초콜릿과 사인 앨범은 지금도 나에게 단순한 굿즈가 아니라, 그 겨울의 선택과 마음을 기억하게 해주는 조용한 증거로 남아 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크루즈 팬싸에 가지 못했던 그날은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오히려 그 일 덕분에 내가 왜 이렇게 오랫동안 태민이를 좋아해 왔는지 더 분명해졌다. 직접 만나지 못해도 마음이 전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나는 여전히 태민이를 많이 좋아한다. 예전처럼 모든 순간을 쫓아가지는 못하지만, 그 마음만큼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결국 내 삶의 선택들과 함께 흘러가는 일이라는 걸, 그 겨울이 가르쳐줬다. 아쉬움까지 품고도 멈추지 않는 마음. 그날의 선택은 후회가 아니라 내가 사랑을 지켜내는 나만의 단단한 방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