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왜 읽나요?

두 권의 책을 읽고

by 호시절

한참 지난 일이었다. 사람들은 내 가방이 항상 묵직한 이유를 물어보곤 했다. 특별한 일이 있어 대단한 짐을 가지고 가는 것 아니고선, 가방 속엔 책 한 두 권이 늘 함께했다. 어느 날은 두꺼운 책을 읽다가 뒷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져서 그 묵직한 걸 감당하고선 종일 품고 다녔던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아는 사람(딱 그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했던 사람)이 책을 읽느냐며 멋지다고 말했다. 굳이 멋지다는 말을 듣기 위해 책을 읽는 건 아니었지만, 멋쩍게 대답했다. 읽는 걸 좋아한다고. 어떤 책을 읽느냐고 물어보기에 요즘 나온 신간 소설을 읽는다고 답했다. 나의 착각이었을까. 기분 탓이었을까.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소설이라고?" 짐짓 놀라면서 마치 '그런 류의 책들은 사는데 별로 실용적인 도움이 안된다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의 질문은 거기서 멈췄다. 그런 그의 표정과 태도를 보고 나도 멈췄다. 그간 '읽는 행위'에 대해, 특히 그중에서도 문학을 읽는 것에 대해 많은 작가들의 답이 있었지만 나의 답을 명확히 말하고 싶었는데, 왜 읽는지, 그러한 맹목적 행위에 대해 정작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문학을 읽는 이유에는 다양한 자기만의 답이 있다. 누구는 시간을 채우는 가장 흥미로운 방식이기에, 누구는 비극적인 상황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서, 누구는 당시의 사회상을 엿보고 이에 자신의 행위를 반추해보며 성찰하기 위해, 그렇게 갖가지 이유들을 부차적으로 달며 '읽는다.'

그렇다면 나의 답은 어디에 있을까. 해를 거를 때마다 편향된 독서 취향을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나의 독서 취향은 문학이 80프로 이상을 차지한다. 아마 그 기저에는 학창 시절 학교를 벗어나 사회라는 무대를 만화경으로 보는 듯한 느낌을 줬던 한국 근대소설들이 중심에 있겠다. 혹은 수업시간 나의 정신을 공상으로 가닿게 한 흥미로운 외국소설들도 있겠다. 그러나 부족하다. 좀 더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를 찾는 것은 아니지만 이 모든 걸 수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최근 두 권의 책을 읽으며 그 답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책은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이다. 이 책의 아홉 작품들은 여러 구도 속에 놓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아이를 잃은 부부, 여행 가이드와 가족, 오랜 손님과 그를 바라보는 아이, 어떤 공동체의 구성원 등. 이 관계들은 어딘가 위태로워 보인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그것을 컨트롤하려는 것이 결코 의지대로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여러 가지 상황들이 내 삶에서 없으리라 확언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특정 공동체에서 의도와는 달리 한순간에 배척당할 수 있으며, 상대에게 한껏 기대했던 행동들이 단순히 나만의 희망일 수 있다는 결코 낯설지 않다. 여기서 나는 '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와 같은 논리적인 사고 추론보다는, 그저 한 단어. 묘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삶은 이런 면도 있어. 항상 복잡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단순하지도 않지. 그러니 네가 이런 상황에 처한 들 너무 낙담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두 번째 책은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11회)>이다. 대상 작품인 강화길의 '음복'은 내가 여태껏 자라면서 느끼고 본 것들을 담아냈다. 이 작품은 제사를 둘러싼 나와 남편,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그리고 고모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어릴 적부터 홀 며느리였던 어머니의 제사, 명절 음식 장만을 옆에서 도왔던 나에게는 전혀 생경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여성 서사를 접하면 '정말 여성으로서의 삶은 이렇게 고통일 수밖에 없는가? 삶은 이렇게나 녹록지 않은 것인가?' 좌절을 할 때가 있었다. 너무나 현실적이기에. 그간 사회적으로 부여하는 여성 이미지에 갇혀 있는 나의 모습을 자각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불편한 상황을 굳이 불편하지 않게 받아들였던 태도. 이 모든 것이 어쩌면 학습의 결과물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이렇듯 어떤 이야기 안에서 읽어낼 수 있는 슬픔과 기쁨, 상실의 감정들은 때론 공감을 자아내기도 하고 두려움에 빠지게 한다.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 비탄감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 적도 있었고, 환멸이 나기도 했다. 이 감정들이 '아는 사람'의 말마따나 현실을 살아가게 하는데 어떤 실제적 도움을 주는가.

문학을 접하며 종종 힘든 감정에 빠지면서도, '계속해서' 읽는 이유. 결국 내가 문학을 읽는 가장 큰 이유는 '느낀다'라는 한 단어로 수렴했다. 줌파 라히리의 책을 읽으면서는 묘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고 젊은 작가상 작품집을 읽으면서는 슬픔과 함께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듯 감정의 여러 형태들을 직면하면서 나는 무르익는다. 그렇게 생각하자 문학이 한때 슬픔에 빠졌던 나를, 혹은 앞으로 슬픔에 빠질 나를 지탱하게 해 줄 무언가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문학을 왜 읽나요?'

앞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달라질 수도, 혹은 덧대어질 수도 있겠으나, 현재까지의 문학이란 나에게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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