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사랑하는 것들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망설인 적이 있다. 그것들에 굳이 순위를 매기거나 분절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갑작스레 받은 질문에 ‘어, 나는 있지…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고 회를 사랑해…’라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돌아와 생각해보니 이건 너무 대상 그 자체에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는 각각에 서사가 있다. 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하고. 그러다 문득 ‘어떤 하루’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여기 사랑하는 것들로만 채우고 싶은 하루가 있다.
토요일 오전 일찍 눈을 뜬다. 어릴 적부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주말이라고 수면 패턴이 바뀌는 것은 아주 가끔. 괜한 적막에 갇히는 새벽보단 어제의 잘못을 리셋하는 착각을 가져다주는 아침 공기가 좋다. 관성처럼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음악을 틀고 스피커에 연결한다. 일찍 일어난다고 딱히 엄청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여유 시간 동안 하루의 계획을 세워본다. 오늘은 어떤 책을 읽고, 어디로 발걸음을 해볼까와 같은. 물이 다 끓은 후엔 인스턴트커피를 텀블러에 채우고 트레이 반 정도의 얼음을 가득 넣는다. 얼죽아는 뜨죽따들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얼음이 좋다. 얼음을 한껏 먹어도 눈치 보이지 않는 여름도 좋다. 여름이 좋은 더 선명한 이유가 있지만, 얼음도 분명 공헌했을 거다. 물복과 딱복 중에 단연 말랑한 물복이 최고라며 복숭아를 입 안에서 녹이고 짐을 챙겨본다. 어깨와 허리가 분명 성치 않은데 책 보부상 마냥 굳이 두 권의 책을 챙긴다. 세 살 취향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소설을 보고 처음 펑펑 울었던 열두 살 이후로 그 난무하는 감정들을 다시 느껴보려고 계속 읽었다. 읽다 보니 어느새 이야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합리화를 하며 서머셋 몸의 소설과 백수린의 소설을 챙긴다. 외국 소설 옆 한국 소설. 든든하다. ‘가방을 초 경량으로 바꾸는 한이 있어도 책은 포기 못해’라고 혼잣말을 하며 집을 나선다. 기계 욕심은 별로 없지만 음악을 듣는 기계는 좋아야 한다며 장만한 이어폰으로 오랜만에 김신의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이름만큼 수년간 믿음직스러운 노래를 들려준다.
산책을 하면서 목격한 장면들은 살뜰한 기쁨을 준다. 노란색 티셔츠에 빨간 모자라는 다소 이질적인 패션의 고등학생 무리가 보인다. 씩씩하게 웃는 소리엔 세상 걱정이 잠깐 비칠 뿐이다. 오갈 데 없는 수많은 헛소리가 어느샌가 삶의 묵직한 고민들로 바뀐 20년 지기 친구들과의 단톡방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이들은 멀리서 각자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연세가 조금 있어 보이는 택시기사님들이 공원의 초입에서 햇살을 받으며 대화를 나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야. 노동을 하기 위해 헤어지는 몸동작마저 생기가 돈다. 더위가 시작될 무렵 어깨동무를 했다가 점점 차오르는 열기에도 차마 의리를 져버릴 수 없다는 듯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남자아이 두 명의 모습이 보인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많은 사람들의 달뜬 낯빛 같기도 하다. 이런 여름 속 다양한 질감의 생동감을 사랑한다.
혼자만의 시간은 사랑을 넘어 생존의 문제에 가깝다. 에너지가 많지 않은 내겐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응당 충전해야 할 몫이 있다. 사람 구경, 거리 구경, 여름을 감각한 후엔 평소에 눈여겨보았던 카페로 향한다. 해가 중천인 낮이지만 술을 파는 곳이면 조금 더 매력적이다. 사람들을 만나기 전 ‘멍 때리는 시간’ 확보는 중요한 과업 중 하나이다. 누군가와의 약속 한두 시간 전의 시간이 주는 가만한 기쁨. 저기 멀리서 취향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오고 있다. 가까운 듯 적당한 거리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다. 이들과 맛있는 음식 술을 진득하게 먹으며 취향을 나눌 때의 느낌과 대화를 사랑한다.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 필연적으로 피로를 동반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행복한 피로에 가깝다.
약간의 여운을 남기고 다음을 기약한다. 적당한 아쉬움이 남는 만남은 건강하다. 긴 외출을 끝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사랑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다. 엄마 친구 딸은, 엄마 친구 아들은, 엄마 친구의 친구의 딸은, 엄마 친구의 친구의 … 엄마들이 할 수 있는 많은 이야기를 듣고 내 친구는, 내 친구의 아는 사람은, 내 친구의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은 … 로 화답한다. 이야기의 끝에 비로소 ‘나는 요즘 이렇게 살고 있어’를 넌지시 얘기한다. 그러자 엄마가 뭐 필요한 게 없냐고 물어본다. 필요한 것이 있어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감추는 스킬은 나날이 성장한다. 가족들의 얼굴들을 떠올리며 괜히 울컥해진 마음을 마일스 데이비스의 ‘It never entered my mind’와 엘라 피츠제럴드의 ‘Misty’로 달래 본다. 음악을 들으며 걷는 저녁 시간은 사랑하는 대상을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 또한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오늘은 집에 가서 어떤 영화 한 편을 보고 잘까.
누군가 다시 ‘사랑하는 것들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대충 이런 하루를 들려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