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by 글똥

창남이는 호텔 지배인이다. 핑크빛 부다페스트 호텔을 찾는 손님들에게 인기가 많은 창남이. 84세의 마담 D. 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창남은 어이없게 의문사한 마담 D. 의 살인자로 지목되어 감옥에 들어간다.


늙은 제로가 이야기하는 창남과의 시간, 그리고 부다페스트 호텔을 운영하게 된 사연을 투숙객인 작가 아서에게 하나씩 들려준다. 로비 보이로 들어온 인턴 제로와 선임 지배인 창남의 이야기가 핑크빛 아가사와의 사랑을 베이스로 영화는 계속된다. 아가사, 영화 <작은 아씨들>의 용감한 조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 자꾸 오버랩되는 상상을 떨치느라 조금 버거웠다. 그러나, 멘들 빵 속에 금속 도구를 넣어 감옥으로 들여간 것과 사과를 든 소년 그림을 찾으러 간 용감한 행동을 보면서 그녀에 대한 신뢰가 예상 점수를 웃돌았음을 고백한다.


에곤 쉴레, 한 때 그의 작품과 영화를 보고 심취했던 적이 있었다. 마담 D. 가 남긴 명화 <사과를 든 소년> 액자를 떼내고 창남이가 걸어 둔 그림을 보는데 웃음이 피식 나왔다. 난 왜 클림트가 질투할 만큼 재능 많고 유명했던 그가 떠올랐을까. 예술에 미쳐 누드 그림을 그렸던 오스트리아의 화가 에곤 쉴레. 콜레라 독감에 걸려 일찍 생을 마감한 그를 생각한 건 과연 나뿐이었을까. 성적이고 야한 그림을 보는데 순간 그가 섬광처럼 스쳤다. 마치 창남의 일생이 세상에서 대접받는 현실을 대변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건 여기서부터다.


내가 부르는 주인공 구스타브의 또 다른 한국식 이름, 창남. 부다페스트 호텔이 성황을 이루는 이유는 창남 때문이다. 외롭고 늙고 돈 많은 여인들이 찾는 호텔이 핑크빛으로 아름다운 이유다. 세상이 외면하는 그녀들을 맞아주는 유일한 장소, 아들에게 살해당한 마담 D. 의 마지막 유언이 창남을 향해 있는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은 영화. 그러나 조금은 씁쓸한.


실은 아들이 엄마인 마담 D. 의 유산이 탐이 나 살해하고 창남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것이다. 변호사가 뜻대로 유산을 처리해주지 않으니 킬러 조플링을 고용해 죽이고, 고쳐 쓴 유언장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도 죽여버리는 비정한 아들 드미트리. 웃기는 건 드미트리 역의 배우가 또 에곤 쉴레를 닮았다. 유럽인이 보는 동양인이 다 비슷하듯 내 눈에도 유럽 남자가 다 비슷하고 턱선이 날렵하여 잘 생겼다로 통칭되는지도 모르겠다.


각설하고, 예고편을 보면 핑크빛 호텔에 빨려 들어갈 것 같다. 멘들 빵을 만드는 아가사도 예고편에서 보여 준 것이 거의 다다. 살짝 맛 본 호기심으로 기대를 하고 시리즈 온에서 영화를 구매했는데 맛을 너무 많이 봐서인지 배는 불러 더부룩, 새 요리는 없으니 이제 기대치가 실망감으로 바뀐다. 영화를 보면서 쓸모없는 예고편에 감정 이입이 많이 됐다는 걸 깨닫는다. 예고는 예고로 끝난다. 본편에서 그 이상의 아름다움과 환상을 기대하면 실망이 크다.


게다가 킬러의 사람 죽이기가 뜬금없다. 서지 X 여동생의 잘린 목이 배달되고, 변호사의 손가락 네 개가 박물관 철문에 잘려 나가고, 또 킬러는 제로에 의해 어이없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다. 더 기가 막힌 건 창남이 기차에서 허망하게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는다는 것이다. 지난번 기차에서 있었던 동일한 상황이 발생했건만 대처 능력이 저것밖에 안되나 싶어 화가 났다. 설마 이번엔 검문을 피해 갈 뭔가가 있겠지 싶었는데 없으면서 당당한 창남의 헛소리에 기가 막혔다. 이쯤에서 생각을 정리하자면 불안과 허영과 천박과 금발과 외로움을 가진 그와 그녀들이 이쪽에 있다면 제로와 아가사는 저쪽에 있는 게 확실하다. 그와 늘 함께였던 제로만이 그을 수 있는 선이다.


모든 전개가 복선이 없고 단순했다. 누가 봐도 추리가 되는 가벼운 영화였다. 그래서 죽음도 가볍고 왠지 킬러의 느낌도 가벼웠는지 모르겠다. 온통 동화 속 같은 핑크로 내 시선을 사로잡은 감독이 도대체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이었을까. 어른이들을 위한 살벌 달콤한 동화를 한 편 보고 난 후 감상문을 쓰는 중이라고 하면 될까. 그가 흩어놓은 영상들을 내 삶의 조각들과 끼워 맞추다 보니 인간 군상들의 삶이 전편에 녹아 있는 듯도 하다.


바보스럽고 모자란 듯한 제로, 순수하고 착한 아가사. 서로 사랑하는 둘의 공통점은 악의가 없다는 것, 하나 더 추가하자면 욕심도 없다는 것. 부다페스트 호텔은 그런 자가 운영하게 된다는 것. 마담 D. 는 그의 연인 창남에게 모든 유산을 물려주고, 창남이 죽음으로써 제로에게 모든 재산이 넘어갔다. 그러나 제로는 새로운 정부로부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모든 재산을 포기한다.


영화를 다 보고 자막이 올라간다. 보는 내내 한심하고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는데 다 보고 나니 "바보 같은 제로"라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늙은이 제로가 운영하는 부다페스트 호텔에 나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일 년에 세 번, 일주일씩 머물다 가는 제로를 한번 만나고 싶기도 하다. 그와 식탁에서 와인을 기울이며 다시 한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1927년, 세계 대전이 끝나고 지금은 사라진 유럽 대륙 동쪽 끝의 주브르부카 공화국, 알프스 산자락 네벨스바드에 있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주소는 알아뒀으니 견딜 수 없이 벅차오를 때 떠나 볼 일이다. 나의 기차 여행, 나의 보리밭, 나의 멘들, 나의 제로, 나의 아가사, 나의 그림 한 점도 GB에 가면 능히 찾을 수 있으려나. 지금부터 이 영화 제목은 <나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되겠다. 그러고 보니 내 곁에 누군가가 제로의 삶을 보여주고 있고, 아시다시피 그 호텔은 멀지 않은 곳에 있고, 낯간지럽게도 주인공 아가사는... ㅎㅎㅎ, 누가 내 볼 좀 꼬집어 주시길.


역시 웨스 앤더슨, 그가 이겼다.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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