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들의 시간

by 글똥

Ethiopia, 노란 껍질에 고이 잠든 너를 가만히 흔든다. 하얀 속옷을 살며시 벗기면 빛나는 검은 얼굴의 두건을 쓴 여인이 내게로 온다. 향기는 사방으로 번져 나를 통째로 휘돌아 감싼다. 익숙한 광고의 짙은 잔상이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한다. 브람스의 심포니 3번 2악장을 들으며 너를 마신다. 낙엽 다 지고 바람도 잠든 숲길을 산책하고 싶은 고요한 11월 어느 아침, 나의 거실에는 오직 너와 나, 둘 뿐이다. 새콤하고 산뜻하고 가벼운 느낌의 네가 좋은 건, 너를 만나면 내 하루치 생의 무게가 향을 실은 김을 따라 사라지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함께 가벼워지고 즐거워지기 때문이다.


Brazil, 너를 가둔 연보랏빛 포장을 열고 물을 붓는다. 부드러운 너의 입자들이 한꺼번에 내 후각을 장악하는구나. 사각형 틀을 따라 달팽이집을 지으며 안으로 안으로, 다시 밖으로 밖으로. 드디어 한 모금이 입천장에 닿는다. 오늘은 이다지도 부드러운 것들만 남는 걸까. 안개 낀 토요일 아침, 내려다보는 지상의 움직이는 모든 것이 브라질에 담긴다. 브람스 심포니 4번 3악장이 힘차다. 날아올라라, 찬란한 나의 날들아. 나와 연결된 모든 것이 창공에서 춤추는 시간, 나는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Kenya, 너는 무거운 늦가을 공기에 내려앉은 아침 안개다. 자욱한 안개를 끌어모아 너를 내리고 너를 마신다. 나는 온통 네가 되어 겨울 숲으로 들어선다. 물기를 빼고 찬란한 색들을 버리고 땅으로 온 마른 잎들을 밟는다. 바스락바스락, 부서지는 소리가 음악이 되어 나를 치유하는 곳, 떡갈나무잎들과 조우하며 또 한 번 내 안의 너를 깨운다. 왠지 너는, 모든 색을 버리고 갈색으로 남은 이 계절을 끝까지 지키는 친구 같다. 고마운 케냐, 케냐.


Columbia, 비가 온다. 이제 추워질 모양이다. 급체로 밤새 고생한 남편이 출근하고 한참 동안 거실에서 밖을 보았다. 감상에 젖어 바라본 안개가 이내 미세먼지라는 걸 알고 창문을 서둘러 닫았다. 빨간 포장을 뜯고 너를 내린다. 아직 주방에는 남편이 남기고 간 모과차 향이 은은하다. 빗소리처럼 너를 적시고 흐르는 아메리카노. 오늘은 더욱 정겹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들으며 너를 마신다. 처음부터 나였던 듯이, 콜럼비아가 나를 마신다. 비에 젖고, 음악에 젖고, 커피에 젖는 아침.


Guatemala, 밤새 바람 소리에 몇 번이나 눈을 떴다. 11월의 사라짐과 12월의 잉태가 맞물린 밤이어서 세상은 더 혼돈스러웠는가. 뒤척이다 새벽에 까무룩, 깊은 잠을 잤더니 어느새 날이 환하다. 고통 없이 자라나는 게 어디 있다고. 보랏색 이불을 덮고 잠든 너를 선택한 건 모든 것을 견딘 색이란 생각에서였다. 날씨만큼 소란스러웠던 내 마음이 네 향에 잇대어 잠잠해지길. 뜨거운 태양을 이기고 잘 영근 원두처럼 내 마음도 이 고민을 해결하고 일상으로 무사히 안착하길. 한 모금 또 한 모금, 네가 조금씩 차올라 내 안의 메마른 것들을 적시고 다시 출렁인다. 번뇌도 깊이 잠겨 스틱스 강까지 흘러가 버리길. 남미라면 반드시 가닿고 싶은 나라, 그들의 커피, 과테말라와 함께 12월을 연다.


Blend, 너를 선택한 이유는 번아웃이다. 어쩌면 12월은 이렇게 바쁠까. 그동안의 동시 수업을 모아 책을 만들자니 시간은 빨리 흐르고 편집은 더디다. 밀린 퇴고와 인사말, 초대장 등 할 일이 태산이다. 2013년, 2년 동안 써 온 수필을 모아 책을 낼 때도 동동거리며 애를 태우다 결국 해를 넘겨 출판했다. 그 후 3년 동안 글 한 줄 쓰지 못했던 번아웃의 나. 요즘 다시 그 시절을 겪는 중이다. 퇴근 후 식탁에 앉아 마무리를 해 놓고 새벽에 눈을 떠 다시 들여다본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언어들이 뒤섞인 머릿속이 정돈되려면 반드시 밤의 휴식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반듯한 한 권의 책으로 나오기까지는 결코 쉼이 없는 글의 세계. 잠시 원고를 밀쳐 놓고 커피를 마신다. 너를 내 안에 품으면 이번엔 번아웃으로 가는 길은 잃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어쩌면 네가 번아웃을 행복 바이러스로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아서.


Tanzania, 붉은 정열의 포장을 열면 네 나라의 열기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은 착각 그리고 기대. 깊은숨을 들이키며 너에게로 가까이 몸을 숙이는 이유다. 연가를 내고 아침부터 순례처럼 다녀온 병원, 맥이 풀리고 진이 다 빠진 정신을 위해 너를 내리는 오후. 너를 키운 붉은 태양이 오늘은 나만을 위해 뜨거웠으면 좋겠다. 모든 진료를 마치고 노곤한 오후, 낮잠을 청하기엔 모처럼의 여유가 아깝다. 너를 가득 마시고 주섬주섬 옷을 입고 겨울 속으로 걸어간다. 앙상한 뼈들이 들려주는 숲의 이야기가 간절한 시간. 오늘은 수양버들 가지에 내 이야기도 몇 걸어두고 싶은 날. 콜덴베르크의 아련한 곡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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