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u, 늙으면 페루에 가서 감자를 팔고 싶다는 친구가 있다. 해가 지면 노을을 보며 리어카를 끌고 작은 방에 가서 이른 저녁으로 감자를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다는 그녀. 페루 커피를 마시면 생각나는 그녀, 잉카 여인처럼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어느 날 불쑥 내 앞에 나타나 잘 익은 감자를 들이밀 것 같은. 노곤한 하루치 무게를 싣고 내게로 오면 나는 페루 커피를 내려 그녀에게 권해야지. 물 위에 떠 있는 우루스에 나란히 앉아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 감자 한 입, 천천히 삼켜야지.
Rwanda, 가난한 나라, 개발도상국 아프리카의 원두. 르완다를 마시며 손경민의 찬양을 듣는다. 행복, 은혜, 충만, 감사. 내일 정기 검진을 앞두고 듣는 이 곡들은 어떤 약보다 심신의 안정제가 된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 나를 위로하는 찬양으로 아침부터 눈물샘이 마르지 않는다. 어쩌다 르완다, 였을까. 아프리카의 모로코로 떠난 친구, 그녀는 대학 시절을 함께 한 과 친구였고, 오돌이라는 멤버 중 한 명이었다. 삼십 중반쯤이었지 싶다. 네덜란드 선교사와 결혼하고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며, 시내에서 오돌 멤버와 만나 인사를 나눴던 추억이, 오늘 르완다를 마시며 새록새록 떠오르는 건,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으므로, 마침내 신의 손에 이끌려 이제 나도 타오르고 싶은 간절함이라고 하면 될까.
Honduras, 우정의 커피, 베토벤의 피아노 3중주 7번. 루돌프 대공과의 인연을 품은 음악을 들으며 마시는 커피는 오래전, 친구에게 쓰던 편지를 떠올리게 한다. 우체국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때가 그리워진다. 커피가 온몸을 적시고 음악이 나를 추억의 장소로 데려간다. 나는 편지지를 꺼내 'ㅇㅇ에게'로 시작하는 글을 써 내려간다. 꾸깃꾸깃 몇 장이 바닥에 버려지고 나는 다시 새 편지지를 꺼내 이야기를 시작한다. 밤새워 적고 또 적어도 행복할 시간, 이 편지를 받은 친구도 꿈속 어느 카페에서 내가 마신 커피를 마시고 내가 듣는 음악을 들을 수 있기를.
Panama, 너를 내리며 한 남자를 기억한다. 오늘처럼 습하고 무더운 날은, 물고기들이 허공을 헤엄쳐도 될 것 같은 축축함이 사방에 널린 날은. 물고기들의 아버지였던 남자, 물고기들의 역사를 위해 고군분투하였던 대지진* 속의 그를 기억한다. 흩어진 물고기 비늘을 찾아 헤매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생각한다. 그의 잘못된 모든 것을 바로 잡으려는 이야기, 오늘은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파나마의 아콰마린 색 해변을 서성인다. 어쩌면 파도의 끝에 닿은 내 발가락 사이로 문득 에베르만니아 파나멘시스(Evermannia panamensis)**가 꼬리를 흔들며 인사를 할지도 모를 일이다.
Costarica, 봄이 오려는가. 2월의 바람이 꼭꼭 여민 내 마음을 두드린다. 창을 열고 너를 마신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이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는 거실, 평화로운 아침의 한 때.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눈을 떠 맞이한 하루가 감사하고,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이 내 앞에 있어 행복한 시간. 코스타리카의 커피나무가 통째로 내 마음에 심겨 세포와 혈관으로 쉴 새 없이 실어 나르는 이것은 분명 살아있음의 생생한 흔적. 그러므로 나는 더욱 천천히 너를 내 안에 가두는 중. 모든 것에 샅샅이 스미는 중인 너는 분명, 봄이로소이다.
Papua New Guinea, 너를 벗기는 순간 코끝에 와닿는 비릿함. 너의 처음과 끝은 발목을 간질이는 파도 거품을 신고 백사장을 달리는 소녀의 발길과 호흡과 손길이 만들어 낸 길이 틀림없다. 뉴기니 섬의 태양이 키워 낸 사춘기 소녀의 첫 월경과 붉은 커피 열매는 어쩌면 P.N.G. 너의 결정체가 아닐까. 열다섯, 잊고 있었던 나의 수십 년 전 그날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완경에 이른 오십 대의 어느 날 아침, 비릿한 달콤함으로 마셔도 충분한 커피의 시간. 바다 건너 내게로 온 P.N.G. 의 어느 소녀를 위해 오늘은 '소녀의 기도'를 들어야 할 것 같은.
El Salvador, 파도가 몰아치는 바닷가, 4월이면 하얀 고래가 나타난다는 푸른 바다가 여기 숨어 있구나. 찰랑찰랑, 수위를 넘나드는 크레마의 몸짓이 내겐 허먼 멜빌의 모비딕이다. 너새니얼 호돈의 주홍글자에 반하여 그에게 헌정하였다는 소설. 영화를 보길 잘했다. 드립의 시간, 모든 것이 내게로 깊이 안긴다. 오감의 절정에서 엘 살바도르, 너는 내 몸을 뚫고 적도의 어느 심연에 닿아 서서 자는 백경의 곁에 오래 잠잠할지어다.
Mexico, 초록의 바람이 불어오는 경산의 아침, 중산지를 내려다보며 멕시코를 내린다. 바람에 흔들리며 춤추는 커피의 향에 소란스러운 마음을 씻는다. 태평양을 건너 여기까지 왔을 너희들의 여행에는 세상의 모든 계절***이 함께했으리라. 뾰족한 것들이 사라지고 둥글어지는 마음의 모서리에서 오늘을 시작한다.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은, 넉넉한 감사함으로.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 파나나 망둥이의 유일한 완모식 표본
*** 마이크 리 감독의 영화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