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명절 연휴의 끝자락을 잡고 봄이 오려나 보다. 창문을 여니 세상이 온통 안개에 가려 희미하다. 빗길에 미끄러지는 자동차 소리와 비를 품은 바람이 나를 반긴다. 밤이 깊어가는 중이다.
세상의 이런 풍경은 지극히 몽환적이다. 호수를 둘러싼 불빛과 듬성듬성 밝혀 둔 가로수가 지상의 별자리처럼 빛난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닮은 모양, 삼태성과 카시오페이아, 북두칠성까지. 나는 지금 35층의 서재에서 커피를 마시며 눈 앞에 펼쳐진 바깥 풍경을 여유롭게 감상하고 있다.
대만에 가면 101빌딩이 있다. 대나무의 형상을 한 건물의 35층에는 스타벅스가 있는데 예약을 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카페이다. 수년 전, 지인들과 자유 여행을 가게 되었다. 여행 일정을 준비하면서 그곳을 예약하기 위해 무수히 전화를 돌리던 기억이 난다. 일행 중 한 명이 수백 통의 전화를 한 끝에 겨우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 우리는 잔뜩 기대하고 택시를 탔다. 우선, 그 빌딩의 지하에 있는 유명한 식당을 찾아가 점심을 먹기로 했다. 한 시간 줄을 서서 샤오룽바오를 먹고 엘리베이터로 갔다. 이제 곧 35층의 스타벅스에서 대만 시내를 내려다보며 우아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기대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 앞에 사람들이 있었다. 보안이 얼마나 철저한지, 스타벅스에 들어가기 위해서 1층에서 번호표를 받아 기다리면 직원이 내려와 우리를 싣고 35층으로 데려간다는 것이다. 커피 한 잔 마시기가 이렇게나 어렵다니, 투덜대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여행지의 마지막 코스였다.
대만의 4월은 주로 흐리거나 비가 왔다. 덕분에 우리의 옷차림은 단정하다거나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습기를 온통 빨아들인 물 먹은 하마이거나 비를 조금씩 맞아 군데군데 젖은 얼룩 생쥐처럼 우스꽝스러웠다. 그런데도 35층에 엘리베이터가 서자 우리는 지하철에서 가방을 내던지고 자리를 차지하는 아줌마처럼 재빠르게 카페가 위치한 복도를 향해 경보로 내달렸다.
체면과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창가를 선점하고픈 욕망이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이런 곳에서 마시는 커피는 얼마나 달콤하고 마음은 더없이 행복할까. 목적을 이루었다는 기쁨도 잠시, 좀 더 여유를 갖고 풍경에 젖어 사색하는 멋까지 부리기엔 주어진 시간이 짧고 카페에 자리한 손님들의 소음이 너무 컸다. 줄을 서서 음료를 주문하고 한참을 기다려 커피를 가져왔지만, 이미 지친 나는 음미할 새도 없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에너지가 모두 방전된 것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내가 이러려고 여길 왔나 싶을 정도로 카페 내부의 모든 풍경은 실망이었다.
대만의 부자들이 산다는 101빌딩의 카페에는 낡은 탁자와 통일성이 없는 색깔과 모양의 의자들이 난분분 놓여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보던 카페와는 느낌이 너무 달라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고층에서 시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여행객들의 호평에 희망을 품고 그들이 남긴 사진 속의 자리와 풍경을 찾았다. 그러나 계절과 날짜를 잘못 선택한 탓인지 창밖 세상은 온통 안개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의 인생 최고 장면을 위한 대만의 현실은 안팎 모두 오리무중이었다.
기대와 달리 실망을 안고 돌아왔던 101빌딩의 스타벅스 여행이 끝나고, 몇 개월 뒤에 나는 이사를 했다. 운이 좋게도 35층이다. 서쪽 창을 열면 분수 쇼를 하는 중산지가 나를 반긴다. 성암산 허리엔 솜사탕 같은 구름이 한 덩이씩 얹혀 멋진 풍광을 선사한다. 수백 통씩 전화를 걸어 예약하지 않아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번호표를 받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경산의 별다방 카페는 상시 영업 중이다.
오늘처럼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그날의 스타벅스가 더욱 생각이 난다. 별다방 카페의 잔을 꺼내 커피를 내리고, 창가에 둔 빨간색 와인바 의자에 앉아 천천히 한 모금을 마신다. 나만을 위한 35층의 일인 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