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

by 글똥

탁, 타닥, 탁, 탁, 타닥. 경쾌한 소리가 거실에 울린다. 휴일 오전, 커피를 마시며 남편은 당구 경기를 보고 있다. 빨강, 노랑, 하얀 색의 공이 푸른판 위를 오고 간다. 긴 막대를 손에 쥔 선수가 허리를 숙이고 공을 친다. 벽을 맞고 튕겨 나간 공은 정확하게 나머지 두 개의 공으로 굴러가 차례로 점수를 낸다. 신기하다.


나란히 공 세 개가 놓여 있다. 문외한인 내가 보기엔 바로 옆으로 막대기를 휘두르면 맞힐 것 같은데 선수는 공도 없는 공간에 하얀 공을 날린다. 남편은 ‘세 번 벽치기’라는 말로 당구 시합의 규칙을 설명한다. 하나의 공으로 두 개의 공을 모두 맞혀야 하지만, 벽이라 할 수 있는 사각형의 틀을 반드시 세 번 이상 맞혀야 점수가 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각도다. 지척에 공을 두고 엉뚱한 곳을 향해 공을 보내는데 당구를 좀 해 본 남편은 “그렇지”, “됐다” 하며 열혈 시청 중이다.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포즈를 취하는 선수의 눈빛과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음부터 저 각도를 잡을 수 있었을까. 보이지 않는 각도를 계산하며 허공에 공을 날리던 시간이 아마 어마어마하였을 것이다. 실패와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버티어 여기까지 왔을 것이니, 어쩐지 눈에 보이는 승리보다 힘들었을 지난 세월의 무게가 먼저 전해져온다.


아이의 대학 문제로 마음이 심란한 터였다. ‘자식은 마음대로 안 된다’는 말을 체감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미가 되어 속만 태우고 있는 중이었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필요한 말 외에는 서로 침묵하고 조심하며 살얼음판을 걷듯 날카로워진 신경을 가까스로 누르고 있는 시간.


마침내 어젯밤, 아이와의 긴 상담을 끝내고 결론을 냈다. 부모의 눈에는 모든 것이 뻔해 보이는 길을 굳이 가겠다는 아이의 생각을 무턱대고 꺾을 수 없었다. 가지 않는 길에 대한 후회를 평생 하느니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한 해를 더 공부하라는 게 부모의 결론이었다.


멍하니 당구 시합을 보고 있자니 아이 생각이 난다. 선수가 바로 곁의 목표를 향해 공을 치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날리는 모습을 보며 아이를 이해하고 싶은 상황을 모색한다. 바로 목표를 겨냥했으면 싶은 부모의 마음과 허공을 맴돌다 목표를 이루고 싶은 아이의 마음. 더 큰 바람을 제 몸에 새기고 싶은 아이의 마음을 어찌 모를까.


나도, 남편도 그랬다. 부모의 뜻을 거역하고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보니 결국 돌고 돌아 그 자리에 오게 되는 것을.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 얼마나 힘든지, 평범한 삶을 사는 것도 만만치 않다는 것 또한. 내 자식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너 나 없이 철들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거기에 부모의 희생과 본인이 선택한 세월이 제물처럼 바쳐져야 겨우 깨닫기 시작한다. 뜻한 바대로 목적을 이루면 다행이지만 뜬구름 잡는 시간이 길어지면 어떡하느냐는 고민을 부모로서는 할 수 밖에 없다.


결혼한 지 20년이 훌쩍 넘었다. 큰 아이는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을 준비하며 벌써 관련 공무원 교재를 사서 독서실 이용 중이다. 수년 전, 큰 아이가 수능을 치른 이맘때도 나는 무척 힘들었다. 수능 실패는 아이와 부모 모두에게 공든 시간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고통을 안긴다.


둘째마저 고배를 마시니, 내 삶의 궤적을 돌아보게 된다. 혹시 내가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한 적이 있나, 누군가를 미워한 벌을 받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게 하는, 그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배 아파 낳은 자식의 일이 되니 그리 되더라는 것.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고 싶은 넉넉함이 아니라 줄 수밖에 없는 간절함’이라 했던가.


이제 겨우 이십 년을 산 아이의 몽글몽글한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 어떻게 정착할지 알 수 없다. 세상이라는 넓은 곳에서 이제 제대로 한 번 몸 굴려 도착한 벽이 수능이라면, 목적지를 향해 적어도 두 번은 더 부딪쳐야 목표를 향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더 부딪쳐 보면 목표를 향해 나아갈 각도를 잡기도 쉽겠지. 경험만큼 인생은 깊어지고 삶의 혜안이 넓어질 테니, 부모라는 이름을 가진 책임으로 아이의 푸르고 싶은 꿈을 단박에 꺾지는 말아야지 싶다.


곱고 둥근 세 개의 공이 푸른 사각 지대에서 열심히 굴러다닌다. 경기는 아직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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