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쓰다,짓다 그리고 익다

by 글똥




---그리고

봄이 왔다. 퇴근 후 서둘러 중산지로 향한다. 나는 지금 지난봄, 오월에 만난 친구들을 찾으러가는 중이다. 마음이 몹시 설렌다.


코로나로 경산이 시끌벅적하던 작년 겨울, 봄은 더디게 우리 곁으로 왔다. 열어 놓은 창으로 훈풍이 느껴졌지만, 선뜻 문밖을 나서지 못했다. 친구가 근무하는 수영장에 '역병'이라는 사유로 환불을 요구하는 정갈한 붓글씨체의 팩스를 보낸 어르신의 심정이 우스웠지만 이해가 됐다.

2주마다 하던 독서 모임 몇 개가 모두 중단되었다. 먹고 살기 위한 밥벌이를 벗어난 일상의 숨구멍이었기에 할 일 없이 맞는 토요일 아침이 당혹스러웠다. 같은 감정을 공유한 몇몇이 필사를 시작했다. 춘3월이었다.


아침마다 거실 창 앞에 놓아 둔 작은 식탁에서 시(詩)를 적었다. 따스한 봄 햇살에, 잊고 있었던 어릴 적 담벼락 모퉁이에서의 놀이와 추억이 행간에 뾰족뾰족 유록색 순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나의 김수영과 이원하, 친구들의 손택수, 이병률과 박준의 언어가 내 삶에 접붙여졌다. 덕분에 지상으로부터 0.5밀리미터 정도 붕붕 떠서 꿈같은 하루를 살았다.


낯설었던 마스크가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바깥이 그리워졌다. 조심스레 마당을 나왔다. 어느새 유록색의 봄은 저만치 사라지고 벌써 신록이 무성하였다. 우듬지의 잎들도 바람길을 만들어 하늘로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노을이 깊어지고 하늘이 어슴푸레한 남색으로 물들자, 천지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달빛에 반짝이는 윤슬로 중산지는 봄밤의 운치를 더했다.


세상은 코로나로 삶의 지경을 한정 지었지만, 나의 봄날은 갈수록 풍성해졌다. 중산지를 걷다 보면 문득 내 능력 밖의 언어가 와락 안겼다. 꿀맛 같은 문장으로 나를 더듬어 지나가기도 했다.걷다가 멈추어 선 자리마다 시심(詩心)과 함께 봄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역병을 씻어내려는 듯 비도 자주 내렸다. 맨발로 중산지의 흙길을 걸으면 여기저기서 지렁이가 꿈틀대며 따라왔다. 동쪽의 클로버 동산과 남쪽의 매실 농원, 북쪽의 아카시아 군락지를 지나 서쪽의 보리수 열매가 익기를 기다리며 지렁이가 지나간 길을 다시 따라 걷는다. 걷다 보면 몸과 마음, 영혼이 촉촉하게 젖어 세상만사 부러운 것이 없었다.


중산지의 봄은 ‘ㅂ’을 첫 자음으로 가진 보랏빛 향기였다. 봄비와 봄바람은 시도 때도 없이 오감을 흔들어 깨웠다. 무엇보다 보랏빛 꽃들이 지천으로 몸을 부풀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던 심감(心感)의 요동에 나는 수시로 기분 좋은 멀미를 했다. 지칭개꽃과 갈퀴나물꽃, 수레국화 그리고 보라의 DNA를 가진 토끼풀이 사라질 때까지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살아온 세월을 아무리 늘려도 나는 지금만큼 계절 속에 스민 적이 없었다.


청포도가 익어가던 7월, 詩의 시절을 지나 논어를 적기 시작했다. 이미 나를 관통하기 시작한 언어들이 내 습작의 노트에 촘촘하게 자리를 잡았다. 두툼한 논어의 명문장 아래, 나의 코로나 시절이 함께 수 놓였다.


비로소 나의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했다. 누구라도, 한 사람의 생애는 저마다 귀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당신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를 ‘모든 답은 위대한 자연에 있다’는 가우디의 말에서 찾는다. 반백의 내가 마주한 오늘은 그 어느 날보다 아름답다.


돌이켜보니, 모든 것이 코로나로 시작됐다. 생각의 전환이다. 가을과 겨울이 순식간에 지났다. 나는 즐거운 마흔의 고개를 다 넘고 이제 오십이 됐다. 일 년 동안 읽고 쓰고 지었던 말들과 글들이 문신처럼 심장에 박혔다. 매일의 사색과 노동으로 나는 지금 새로 난 길을 걷는 중이다.


노안이 짙어져 책 읽기가 힘들고 오십견으로 글쓰기조차 즐거운 고통이 되었지만, 내 머릿속의 세상은 여전히 꿈길을 걷는 것처럼 하염없다. 하여, 아직은 보랏빛으로 빛나는 갈퀴나물꽃과 네잎클로버들 사이에서 먼저 청춘의 시절을 지나 하얗게 몸이 센 지칭개꽃을 본다.자연은 저들만의 방식으로 저들만의 시간에 홀로 익어 봄을 떠난다.


사람에게만 시절 인연이 있겠는가. 내게는 오월의 자연도 화양연화를 함께 하였던 한때의 시절 인연이다. 내 몸에서 뭉텅뭉텅 자라고 있는 하얀 머리카락의 흔적을 바라보며 나도 잘 익고 있노라 그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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