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의 신

아룬다티 로이, 문학동네

by 글똥



하필 5월 18일, 오늘 비가 온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아예메넴의 5월은 덥고 음울한 달이다.'로 시작하는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는 필연의 날씨. 그리고 '라헬이 아예메넴으로 돌아왔을 때, 비가 내리고 있었다.'라는 문장은 얼마나 기가 막힌가. 어쩌면 이 비는 23쪽의 몬순 기후로 눅눅해진 공기가인도양을 건너 내게로 왔을 수도 있겠다는 즐거운 상상까지 하게 한다. 어쩌면 그들의 '책장이 눅눅해져 삐걱거'리고 '표지 사이의 책장이 눅눅해져 물결'치는 시간이 나를 오전의 숲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시간들을 이어주는 것은 바로 무수한 빗금으로 엮인 오늘의 비라는 것도.


이 비는 곧 6월로 넘어간다. '하늘이 열리고 물이 퍼붓듯 쏟아져내리면, 오래된 우물이 마지못해 되살아났고, 돼지 없는 돼지우리에 녹색 이끼가 끼었으며... 신이 난 지렁이들이 진창 속에서 자줏빛으로 노닐고 있었다. 초록 쐐기풀들이 흔들렸다. 나무들이 몸을 숙였다.'로 묘사한 풍광은 한 폭의 풍경화면서 비바람 부는 6월의 비를 충분히 표현한다. 그리고 그들의 비는 잠깐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을 스쳐간다. 거실의 눅눅한 공기 속으로 물고기가 헤엄쳐 다닐 것 같은 마르케스의 우기는 로이의 우기와 닮았다. 아마도 남미와 인도의 위도에서 동시다발로 내린 빗방울들이 작가들의 감성을 깨웠던 것 같다.


이 책은 온통 의인, 활유다. 그래서 모든 문장이 詩다. (시를 잘 쓰고 싶다면, 날마다 이 책의 첫 두세 쪽을 천천히 낭송하거나 필사를 해 보라) 좀처럼 페이지를 넘어갈 수 없다. 포도池에서 여섯 신부를 만났을 때처럼. 보리밭이 초록으로 빛나던 4월의 어느 날처럼. 부들池에 내리는 비가 연잎을 탕탕 치며 노래하던 시간처럼 나를 붙든다.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으로 건너가는 일이 매우 느리다. 어쩌다 낱말과 낱말 사이에서 미끄러진 내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한나절이 훌쩍 지나갔고 아니면 어느새 깊은 밤이 되었다. 연애와 면접이 대체로 초반에 승패를 가르듯 소설도 그러하다는 것을 로이는 알고 있다. 그래서인가. 첫 장부터 그녀가 가진 능력의 8할이 돋보인다. 누구라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마력이 번역임에도 충분하게 노출돼 있다. 부럽다. 그녀의 시선과 생각, 모두.


'바람결에 실려오는 오래된 장미향 같은, 역사의 냄새'라니. 이 문장은 장편소설의 징검다리처럼 사건의 흐름 중간에 번씩 나타난다.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장미향은 문득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떠올리게 한다. 멕시코 소설가의 주인공 티타는 장미꽃잎으로 사랑의 묘약을 만든다. 콜럼비아와 멕시코, 남미의 문화권에 스민 장미는 사랑과 역사의 물결로 부커상에 이어 아시아 독자의 마음을 한 번 더 흔든다. 게다가 지금은 5월,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폭죽처럼 터져도 좋을 계절이 아닌가.


예외 없이 <작은 것들의 신>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정치 이념을 다룬다. 힌두교와 이슬람의 분쟁의 도가니는 주인공들의 삶 속에서 거꾸로 읽히는 낱말만큼이나 낯설고 힘들다. 아룬다티 로이는 라헬의 시선에서 클리나멘, 사선의 역동을 일으킨다. 바로 가촉민 벨루타를 통해서다. 그는 라헬의 동심을 이해해주는 유일한 친구다. 그는 라헬의 엄마 암무와도 연인이 되어 계급 사회의 현실에 반향을 일으킨다.


국경도 없다는 사랑, 이념도 뛰어넘는 사랑, 그 사랑으로 따로 살아야 했던 쌍둥이들의 어린 시절. 모든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건을 이어간다. 벨루타로 인해, 벨루타로 하여금, 벨루타가 있어서 그들은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겪었다. 벨루타는 한 여인의 남자였으며, 쌍둥이들의 친구였고, 아버지의 든든한 생계였고, 아픈 형을 보살피는 유일한 핏줄이었다. 신조차 가난한 카스트 바깥, 가촉민이었던 그는 스스로에게도 작은 신이 필요했을 것이다. 중심이 되지 못하는 많은 것은 세찬 바람일수록 함께 눕고 함께 일어나는 법을 먼저 배운다. 작은 것들의 신, 벨루타는 가장 낮은 자리의 풀잎이었다. 어쩌면 그 풀씨 하나가 지금, 우리 곁에도 뿌리를 내리고 우리의 삶을 찬찬히 읽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은 것들의 신>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