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순이 제법 자랐다. 멀리서 보니 듬성듬성 초록잔디다. 산수유 노란 꽃이 봄햇살 마중에 기지개를 켠다. 여섯 신부는 겨울잠에서 눈을 떴으려나. 지난주에 깊은 잠에 든 걸 봤다. 조심조심 진흙을 밟고 여섯 신부에게로 간다. 발이 점점 무겁다. 키높이 신발이 돼 버린 땅, 여기는 유독 바람이 없고 햇살이 뜨겁다.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키가 커진다.
기별 없이 한잠 든 수양벚꽃, 올해도 어김없이 봄날을 기다리는 중이다. 분홍꽃 흩날리기에 2월은 이르다. 햇빛이 아무리 좋아도 설레발이 없다. 신부들의 그 도도함이 좋다. 기다릴 줄 아는 시간, 꽃 피울 시기를 위해 침묵하며 견디는 나무. 나도 섣불리 모든 일에 앞서지 말아야지. 잘난 척 까불지 말아야지. 다 아는 듯 가르치려 들지 말아야지.
발끝에서 올라오는 또 다른 봄의 기별, 정신을 깨우러 온 오늘, 비로소 눈에 띈 초록의 풀들. 무릎을 굽히고 낮추어 앉는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깨진 병조각을 손에 쥐고 조심스레 땅을 판다. 언 땅이 반은 녹았다. 폐부를 찌르고 나를 깨우는 향기, 봄의 전령이다.
한 움큼 손에 쥐고 포도池의 얕은 물가로 간다. 이미 다 녹은 얼음물이 아직 차다. 그 차가움이 좋다. 손 끝의 얼얼한 기분을 즐기며 냉이에 엉겨 붙은 진흙을 흔들어 씻는다. 마른 잎도 떼어낸다. 물속으로 흩어지는 찌꺼기들, 내 손에 깨끗한 냉이들만 남았다. 손이 시리지만, 마지막 한 잎까지 놓치지 않고 씻는다. 조정권의 <산정묘지>는 말한다. '한 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저 시리고 차가운 물이 내겐 지팡이다. 후려치는 지팡이다.
침묵하고 싶어 홀로 찾은 숲. 나는 오늘 봄을 씻었고, 또 나를 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