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자락, 친구와 숲을 거닌다. 여름이 끝나간다는 것은 곧 가을이 온다는 것. 숲은 여름과 가을의 교집합이 되어 가끔 여름이다가 문득 가을이 된다. 수천 걸음 속에 활발발한 세포들이 땀을 뻘뻘 흘려보내다가 바람 한 점에 금세 가라앉기도 한다. 마치 타임머신처럼 여름과 가을을 들락거린다. 계절에만 교집합이 있을까. 우리에게는 삶의 교집합도 제법 많다. 은근슬쩍 50대, 내 편 아닌 남편의 나이와 직장, 게다가 남편의 직급과 퇴직의 어느 날까지. 숲을 거닌 지 3년쯤 되니 은밀한 우리들의 속내도 교집합이 제법이다.
우리가 만난 것도 실은 책이라는 교집합이다. 십여 년의 육아에서 벗어나 막 세상으로 자유의 도발을 시작할 때 우리는 극적으로 만났다. 책을 좋아하고 시를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하고 유니크한 옷과 가방, 신발과 액세서리까지. 고만고만한 키와 체격까지 더해 공통분모가 많았다. 3월의 벚꽃이 난분분한 시절, 그녀는 큰 질병에 맞섰고 몇 달 후 백일홍 꽃잎이 피고 지는 여름 내내 나도 그녀와 같은 병명으로 병원을 오갔다.
그리고 우리는 숲 동지가 되었다. 경산에서 십 수년을 살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이었다. 그녀의 안내지침서를 따라 간 길에서 나는 생의 가장 큰 선물을 받았다. 나도 인지하지 못했던 내 안의 타는 목마름, 그 해갈의 방법을 숲에 들고서 비로소 알았다. 첫 발을 내디뎠던 날, 도심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은 숲에서 만난 모든 생명을 기억한다. 식물과 동물의 이름들을 모조리 읊을 수조차 없는 풍성한 우림 지역이 끝없이 이어졌고, 나는 영화 <아바타>에서 보았던 신비한 풍경의 장소 앞에서 충만한 기쁨을 오래도록 누렸다. 식물의 뿌리가 훤히 드러난 계단식 오르막도 좋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을 반쯤 벌려야 끝이 보이는 키 큰 느티나무 아래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햇살에 반짝이는 잎들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는 일도 그지없이 만족스러웠다.
그 해 여름, 숲은 우리의 비어 있던 마음을 채우려고 굉장히 최선을 다했다. 그때처럼 풍성한 버섯도, 모감주나무의 노란 꽃도,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도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다. 아마도 그해는 그녀와 나를 위한 신의 특별한 선물이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장화를 신고 고인 빗물을 튕기거나 일부러 철벅거렸던 물웅덩이를 지날 때면 숲은 지난여름 이야기로 더욱 수다스러웠다. 특히 여름을 잔뜩 머금은 초록의 공기가 우리를 감싸 안을 때마다 이팝꽃 같은 엔돌핀이 솟아나 몸과 마음이 더욱 건강해졌다. 발끝에 붙어 떨어지지 않던 질병의 시간들도 숲의 풍경 앞에 맥없이 수그러들었다.
그녀와 내가 생계의 밥벌이 자리로 돌아간 후에도 숲 산책은 드문드문 이어졌다. 세상이 바다라면 숲은 푸른 고래의 숨구멍인 물 밖이었다. 우리는 주말이 되면 유영하던 바다에서 숲으로 솟구쳐 올랐다. 세상의 모든 계절은 아름다웠다. 버드나무 가지에 머문 바람과 연잎에 어른거리는 물그림자가 한여름 더위를 이기는 생명의 수액이 되었다. 건조하게 회색빛으로 물들어가던 폐도 다시 부풀어올라 제자리를 찾았다. 검은 물닭과 주황색 장화를 신은 오리 가족이 연잎을 헤치고 유유히 나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시간은 넉넉히 아름다웠음을 여름 끝, 어느 한 자리에 또 새겨졌다.
마주 보며 칼을 높이 치켜든 근위병처럼 초록 터널로 이어진 숲을 지날 때면 그녀는 항상 뒤를 돌아다본다. 여름의 끝이 너무 아쉬워 우리는 또 그렇게 터널의 끝에서 한참을 서 있는다. 산비둘기가 황소개구리처럼 울어제치는 시간, 땀이 비 오듯 쏟아져도 쉬는 날이면 무작정 찾게 되는 숲의 마력은 중독보다 강하다. 거부할 수 없는 삶의 화수분이다. 게다가 숲길에 점점이 흩뿌리는 그녀의 언어들은 교집합의 완성을 이루는 화룡점정이다. 햇빛과 공기와 물, 그리고 특별한 오감의 언어를 먹고 자란 오늘의 숲이 더 찬란한 이유다.
숲의 바깥은 여전히 밥벌이로 소란스럽다. 모든 균형이 깨어지고 가끔 파괴되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을 조화롭게 한다. 특히 여름은 우리의 아주 가까이에서 허물을 벗기고 내면을 새롭게 한다. 뿐인가. 여름의 끝에서 우리는 가끔 비를 만나기도 한다. 가을의 문을 두드리는 신호다. 우리들의 가면을 벗기고 민낯을 향해 다가오는 반가운 손님이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단단히 여민 내 삶의 자물쇠가 경계를 무너뜨리고 후드득 열린다. 옅은 향으로 가을을 알리던 버섯들이 군데군데 몸을 비틀고 올라온다. 습한 공기를 머금기 시작한 여름 숲은 머잖아 엄청난 버섯들을 토해낼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때마다 우리의 산책은 지금보다 훨씬 풍성해지고 더 길어질 것도 안다. 오늘도 열심히 기꺼이 사라져 가는 여름의 흔적이 초록의 잎 사이로 보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흔적들은 잎비가 되어 낙하한다.
가을의 생명들이 여름의 끝을 기쁘게 밀어내고 있다. 순응하는 삶은 거역하는 삶보다 아름답다. 이 모든 순간들이 그녀와 나의 무수한 교집합 중의 하나가 된다. 청춘과 건강이 지나간 자리에 가을 같은 멋진 중년의 계절이 온다는 것을, 지금도 어김없이 숲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