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가 시작됐다. 해마다의 간절함이 더해져 2021년의 시월, 드디어 나는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설렘으로 밤을 보내고 서둘러 나오느라 기온이 떨어진 걸 몰랐다. 동대구역 매장에서 스카프를 샀다. 즐거운 여행길에 소소한 추억이 하나 더해졌다.
모든 일정은 잡기 나름이다. 하루 연차 내기가 이렇게 쉬운 걸 여태 못하고 살았으니. 내년부턴 하고 싶은 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뛰어들기로 마음을 먹는다. 백화점 지하 식당에는 벌써 사람들이 붐빈다. 이른 시간부터 영화제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폭신한 달걀찜과 전주비빔밥을 먹고 상영관으로 고고!
안내 데스크에서 알려 준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 도착한 건물, 가는 길에 레드 카펫 앞에서 인증 샷도 한 장, 시간이 임박한데 사람들이 없다. 지나친 건물로 다시 돌아 허겁지겁 에스컬레이터로 8층까지 올랐다. 온몸에 땀이 흥건해지기 전에 자리를 잡고 감상의 시간 속으로.
‘겟 아웃’과 ‘올드 보이’ 그리고 ‘아일랜드’의 장면이 ‘기억의 감옥’을 보는 내내 오버랩되면서 몰입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영화 중에 삽입된 북소리도 인상적이었다. 대륙의 기본 스케일이 느껴지는 웅장함이 사운드에서 느껴졌다. 모든 창작은 모방에서 비롯된다고 하지 않는가. 이 영화가 그랬다. 무릎을 탁 칠 만큼 반전의 묘미가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2030년의 시대를 그린 영화에서 휴먼을 빼놓지 않고 설정한 것은 탁월했다. 수필의 글쓰기에서 자아 성찰의 마무리가 신의 한 수인 것처럼.
온라인 인터뷰를 하면서 장츠 감독이 낙천적이고 개구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성격이 아마 영화감독을 할 수 있도록 한 장점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좋아하는 일을 행복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본받을 만한 삶의 모습이었다.
잠시 쉬려고 내려온 광장에서 200인의 배우들을 보았다. 그들과 사진도 찍었다. 벤치에 앉아 부산국제영화제가 주는 여유로움을 느끼며 푸른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제도 있었던 하늘, 내일도 있을 하늘의 투명한 색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광장에 울려 퍼지는 모든 소리와 풍경은 일상의 지루함을 달래 줄 치료제가 될 것이다. 행복한 세포들과 함께 기억의 저장고에 고이 모셔 두자.
신세계 1층은 브랜드로 가득하다. 캐시미어 머플러를 하나씩 사서 오늘을 기념한다. 대만 101빌딩의 명품 관에서 꺄아악 소리 지르던 배낭 아줌마가 오늘은 조용히 페라가모, 구찌, 프라다... 입술로 읊조리며 영화관으로 향한다. 어제 산 로또가 당첨되면 다시 올 거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7층에서 만난 이탈리아 영화 ‘키아라’는 마피아 집안의 열다섯 살 소녀의 성장 영화다. 또 다른 마피아 대작 영화 ‘대부’ 가 떠오른다. 어떤 직업을 가졌든 자녀에겐 더없이 따뜻하고 자상한 아버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영화다. 코로나가 끝나면 친구들과 함께 가기로 한 이탈리아 여행에 확신의 방점을 찍게 된다. 영화를 보면 영화 속 이야기 뿐 아니라 그나라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좋다. 나와 다른 곳에서 사는 그들의 문화를 경험하고 싶고, 그들의 음식을 맛보고 싶다. 이국의 바다 냄새와 흙 냄새, 그리고 사람 냄새까지. 살아있다는 것을 자꾸 확인하고 싶은 나만의 방식이라고 해 두자.
처음으로 일하기를 멈추고 부산을 찾았다. 그리고 영화를 보았다.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영화제에서 받은 책자를 열심히 본다. 내년에는 1박 2일쯤 시간을 내서 더 많은 영화를 보고 부산의 모든 것을 느끼고 싶다. 영화관을 찾아 뛰어다니고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움직였던 하루였지만, 마음의 행복 세포는 터질 듯 충만한 하루였으므로 좋다. 참 좋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하여
왔노라
보았노라
좋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