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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라인에 서서

션 스컬리의 전시장을 다녀오다

by 글똥

그녀가 책을 냈다. 짧은 소설 제본이다. 그녀의 글은 좋다. 재미있다. 아마추어의 선을 넘은 지 오래다. 그럼에도 스스로 아마추어라 말하는 그녀의 겸손이 나는 참 좋다. 제본을 축하하며 파티를 하기로 했다. 꽃길을 만들어 주고 싶어 쿠팡에서 빨간 꽃잎을 주문했다. 다이소에서 데이지 풍선과 반짝이 커튼도 샀다. 밥 한 끼 먹이고 싶어 반찬도 잔뜩 샀다. 채식주의자인 그녀를 위해 김치콩나물국도 샀다. 비번인 남편은 기꺼이 세 시간의 외출을 약속했다. 완벽한 준비였다.


일요일 아침, 예배를 드리고 행복매거진 배포 후 식당으로 갔다. 7월은 우리 교구 식당 봉사다. 예배를 마치고 먼저 내려온 구역 식구들이 꽃무늬 몸빼로 갈아입고 벌써 작업에 돌입했다. 후다닥 장화를 신고 앞치마를 질끈 동여매고 칼 한 자루 들고 도마 앞으로 갔다. 양념을 꼭 짜낸 김치가 도마 위에 올려지고 6명의 칼잡이들이 동시에 김치를 썬다. 라르고와 포르테의 속도가 느껴지는 칼의 소리, 오래 봉사해 온 권사님은 두 자루의 칼로 칼을 슥슥 간다. 익숙하고 노련한 장인의 손놀림, 이내 김치 위에서 칼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난타다. 1열 관람의 기쁨도 잠시, 서슬 퍼런 칼날에 혹시 내 손끝이 닿을까 몸은 자꾸 옆으로 비켜선다. 권사님의 신명 나는 춤사위에 한바탕 놀아난 김치는 잘게 썰어져 매우 먹음직하다.


오전의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나니 기력이 달린다. 빨리 가서 집 청소도 해야 하는데 봉사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도 쉴 새 없이 삶는 국수와 육수 덕분에 식당은 덥다. 예배를 마치고 나온 성도들에게 일일이 육수를 퍼 주다 보면 내 몸에도 육수가 줄줄 흐른다. 처음 들어보는 묵직한 주방 국자에 손목이 슬슬 아파온다. 이쯤 되니 친구를 위한 깜짝 이벤트는 일치감치 포기다.


식당 봉사를 마무리하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3부 예배를 드리러 온 차들에 막혀 빠져나갈 수가 없다. 얼른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갔다. 할매묵집에서 조밥과 함께 묵밥을 시켰다. 감자전과 두부도 먹었다. 실컷 먹고도 가성비 갑인 식당, 서민들에게 부담 없는 장소라 그런지 사람들이 붐볐다. 누가 집밥이 최고라 했는가. 한여름의 집밥은 주부의 삶을 절벽 끝에서 밀어버리는 고통과 맞먹는다. 돈만 주면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들면 되는 식당밥이 집밥보다 더 피가 되고 살이 된다. 게다가 벗과의 즐거운 수다로 마음까지 배부르다. 밥과 차의 시간 속에 이제 몸은 한껏 든든해졌다. 발끝까지 힘줄이 돋는다. 그러나 무언가 아쉽고 허탈하다. 우아한 문화생활의 마침표를 위하여 우리는 미술관으로 향했다.


션 스컬리, 아일랜드 출신의 할아버지 작가의 작품이 전시 중이었다. 우리는 전두엽에서 어슬렁거리던 몬드리안과 마크 로스코를 알루미늄 작품들 앞에 흩뿌리며 전시장을 누빈다. 밥벌이의 일상을 한 꺼풀 벗겨냈다는 우월감에 스스로 만족해하며 기념사진도 남긴다. 활짝 웃으며, 가끔 사진 속에서 얄궂은 장난도 치며 오늘을 기록한다. 뽀샵 속에서 우린 10년은 더 젊어졌고, 2배는 더 행복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랜드라인을 고무줄 놀이하듯 가볍게 폴짝 넘는다. 션 스컬리의 수평과 수직이 세 여자의 시간을 수놓는다.


미술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사실주의. 인상주의를 거쳐 추상에 이른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션 스컬리는 궁극의 '랜드라인'을 선포하며 그만의 추상 예술을 설명한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아일랜드의 랜드라인은 무엇이었을까. 섬에서 바라보는 모든 것이 수직과 수평으로 귀결되는 그의 작품의 세계. 닥치고 보면 수직과 수평으로 표현하지 못할 것은 없다. 단순해지면 많은 것이 가능해진다는 걸 우린 이미 살아 봐서 안다. 김치 썰기의 경지에 이른 권사님의 칼춤도, 지금 우리가 누리는 기쁨의 순간도 지나온 시간의 결과물이다. 절제된 동작 속에 불필요한 것들은 사라졌고 수평의 도마 위에 수직의 칼날이 장인의 시간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개의 이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 온 시간들이 비로소 단단해진 자리, 그곳에서 우리는 '나'라는 하나의 랜드라인을 긋는다. 절제와 인내의 결과다. 예술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션 스컬리는 말해주고 있었다.


또 하나의 방, 갑자기 이른 아침 아파트에서 듣던 새들의 노래가 귓가에 울린다. 수직과 수평의 작품 속에서 50종류의 새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날아오르는 새, 날개를 접는 새, 먹이를 낚아채는 새, 물가의 새, 사랑을 나누는 새, 알을 품은 새, 대서양을 나는 새ᆢ. 새들의 하루가 각각의 새장 속에서 알록달록 빛난다. 어느 시인과의 멋진 콜라보로 새들의 삶도 왕성하다. 그들의 글과 그림을 보며 새장 귀퉁이에 나의 랜드라인의 작은 점 하나를 살포시 찍는다.


미술관 입구, 커다란 스크린 속에 종일 작업 중인 션 스컬리가 우리를 보고 있다. 성큼 다가왔다가 다시 등을 보이며 그림 앞으로 나아가 덧칠한다. 반복되는 그의 작업 속에서 천천히 완성되는 랜드라인을 바라보는 시간. 일상의 평범에 머물지 않으려 애쓰는 세 여자에게 그의 수평과 수직은 한낮의 폭염 속에 그어보는 소낙비 같은 세로였으며 발아래 굵은 그늘을 만드는 가로였다. 스컬리의 수평과 수직 끝에서 이제 우리의 랜드라인이 출렁인다. 향기 품은 우정의 곡선으로 넘실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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