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은 최고야

사람 좋은 소행성 - 4화

by 한이음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다녔다.

하지만 선뜻 꺼낼 수 없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지금 그만두면 아무것도 안 돼! 직장을 그만두고 뭘 하려고.”
외할머니의 잔소리까지 겹쳐 들려왔다.


결국 사직서는 조용히 서랍 속에 넣어두고
다시 출근했다.




오후 6시.
벽시계의 초침이 칵, 칵, 칵— 퇴근을 알렸다.
나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 순간, 사수가 나를 불렀다.

“이음 씨, 회장님도 안 가셨는데 어디 가요?”

발걸음이 굳었다.


이 회사에서는 회장님 차가 출발해야만 퇴근이 허락되는 구조였다.

‘비서는 박대리님인데… 왜 나까지 눈치를 봐야 하지.’
입안까지 올라온 말을 꾹 삼켰다.


입사 초반, 회장님의 온갖 심부름은 내 몫이었다.
택배, 커피, 은행, 우편… 뭐든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다 어느 날, 회장님이 말했다.


“얘는 마음에 안 들어. 비서는 박대리가 해.”

그 순간부터 심부름은 사수의 몫이 되었지만
퇴근 눈치는 여전히 내 몫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유는 충격적이었다.

회식자리에서 20대 초반 막내였던 내가

술잔을 들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단다.


무슨 말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저도 성인입니다만?'




형광등만 켜진 사무실.
창밖으로는 퇴근하는 회사원들의 뒷모습이 흘러갔다.
할 일은 없는데,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약속이 있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휴대폰에 깜빡이는 메시지를 조용히 꺼버렸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 한마디가 왜 그렇게 무서웠을까.


1시간, 2시간…

회장님 차 시동 소리가 들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조용히 가방을 들었다.


그날도, 내 청춘은 야근이 아니라
눈치로 소모됐다.




회장님이 산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한 달에 한 번, 토요일마다 전 직원 산행이 있었다.


"산행 꼭 가야 해요?"
조심스레 물었더니, 사수는 단호했다.
“당연히 가야지. 안 가면 안 돼.”


나는 토요일 아침.
한 시간 거리의 산으로 향했다.
그게 회사 생활이라 믿었다.


그런데 정작 산에 도착한 건 나 혼자였다.

그 서글픔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곧이곧대로 믿은 나는 바보 같았다.

단호하게 '가야 한다'라고 말한 사수는 보이지 않았다.


그날, 내 안의 원망이 한 스푼 추가됐다.


산행에도 라인이 있었다.

그날 회장님의 참석여부는 그들끼리만 연락했다.

그 세계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고립시키는 회사.


그날 이후, 나는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말 잘 듣는 신입은 결국
가장 외로운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멀찍이서 그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여기 회사 정말 짜증 난다.'


20대 초반.

세상에서 처음 만난 조직은 생각보다 훨씬 더 차가웠다.

그 차가움에 나까지 물들게 될 줄, 그땐 몰랐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숨죽이는 날들이 반복되자

나도 모르게 나만의 차가움을 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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