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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연 Mar 13. 2017

사랑 보따리

쌈짓돈

서울에 가족들이 함께 올라온 것은 아마도 내가 7살 무렵이었나 보다.

이듬해애 학교에 들어갔으니 아마 내 기억이 맞을 것이다.


서울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엄마는 나와 동생을 보살피기보다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아마 주인이 세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집인지 10 개정도의 방이

일렬로 나란히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옆집은 기계로  스웨터를 짜는 집이었는지

매일 드르륵드르륵 하는 기계음이 쉬지 않고 들렸고 후에 그 집에서 엄마가 보라색 털스웨터를

짜 달라고 해서 나에게 입혀 주신적이 있다.


서울 생활이 녹녹지 않을 거라는 것을 예상한 할머니는 필요할 것 같은 생활용품과 식품을

바리바리 보따리에 싸서 머리에 이고 그 먼 충청도에서 버스를 타고 올라오시곤 하셨다.

할머니가 가져오신 보따리에서는 끝도 없이 필요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과자며 사탕까지도 그 무거운 보따리에서 마술처럼 쏟아져 나오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무거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먼 거리를 왕복하셨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할머니는 언제나 기운 넘치고 당당하고 비장한 모습이었다.

가끔 할머니가 치마춤에서 꺼내 주시는 쌈짓돈은 며칠 동안 내가 좋아하는 과자를 사 먹을 수 있는 금액이라

할머니가 치마춤을 올리려고 하면 기대감과 기쁨에  환하게 웃으면서 기다렸던 때도 있었다.


가끔 시골에 있는 언니를 만나러 내려간 적도 있는데 그럴 때는 어김없이 나는 차멀미에 시달리고

할머니 등에 업혀서 하루를 꼬박 시름시름 앓았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힘든 길을 무거운 짐을 들고 서울과 충청도로 씩씩하게 오갔던 할머니가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년 가까이 이렇게 서울과 충청도를 오갔던 할머니는 아버지와 엄마와 상의를 한 끝에

모두 서울로 올라와서 함께 살기로 하였다.


아마 그 시절에는 우리 집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넉넉지 않아서 그런지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큰 문제였다. 할머니를 비롯해서 아버지 엄마 모두 일을 해도 살림은 예전처럼 좋아지지 않았고  그나마

그 시절에는 나라에서 보급되는 밀가루 쌀 등으로 부족한 살림을 메우고 지탱해 나갔던 것 같다.


나는 음식 중에서 국수 같은 면 종류를 싫어한다. 대부분 면 종류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많이 못 보는데

나는 이상하게 국수 종류는 많이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20대 때 알게 되었는데 어렸을 적에 보급받은 밀가루로 계속 국수를 만들어 한동안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마 질려서 그런 것이라고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었다.


아무튼 서울로 올라와 함께 살게 된 할머니는 어떻게 동네 사람들과 금방 친해지시고 바로 일자리를 얻어서

밭일을 해주고 일당을 받는 일을 거의 빠지지 않고 다니셨다.


할머니의  일당은 손주 손녀를 위한 군것질과 학용품 값으로 할머니  쌈지 주머니에서 빛을 내며 나오곤 했다.


석양이 질 무렵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시고 흙이 묻은 고무신을  탈탈 털면서 당당하게 대문 안으로 들어오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나는 단 한 번도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몸저 누워 계시거나 어디가 아프네 하는 소리를

들어 본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아니 할머니는 언제나 당당하고 바르고 가족을 위해 쓰러지지 않으려는 든든한 나무 같았다.

그 고향집 시골   비바람과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올곧게 서 있었던

수양버들과 미루나무들처럼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토록 강하고 나무 같던 할머니가 아이처럼 무너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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