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단상들
교회 예배 시간에 목사님의 설교에서 종종 예시가 나온다.
성도들의 주의집중을 시키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고, 비유를 통해 깨달음을 주기도 하는 설교 방식 중 하나이다.
설교를 듣다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 끄덕이는 것은 그 말씀에 은혜를 받아서이기도 하지만, 목사님의 차분한 음성에 잠시 나의 정신 줄을 맡기고 졸음을 못 이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재미있는 예시가 나오면 다시 정신 줄을 잡고 말씀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학창 시절에도 수업 시간에는 수업 내용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지만, 수업내용과는 상관없는 선생님의 딴소리가 그렇게 귀에 잘 들려왔고,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 시험 시간에 어떤 문제는 답은 생각은 나지 않고, 그 수업 시간에 들었던 선생님의 다른 이야기 혹은 그때 혼났던 친구의 에피소드만 기억나는 것이다. 다들 이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최근에 들은 설교에서 목사님의 한 예시가 나에게 인상 깊었다.
그 예시는 이런 내용이다. 두 아이에게 나뭇가지와 칼을 주었다. 똑같은 것을 주었는데, 결과가 달랐다.
나중에 보니 한 아이는 나뭇가지와 칼로 배를 만들었고, 다른 아이는 그냥 나뭇가지를 조각내어 놓기만 했다.
그저 나무 조각들의 무더기일 뿐이었다. 나뭇가지로 배를 만든 아이는 전문적인 기술이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나뭇가지를 보고 배를 상상한 것이었다. 상상한 배의 모양을 떠올리며 나뭇가지를 다듬어나갔고, 점점 배와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어졌고, 그 결과 나무배가 만들어진 것이다. 상상하지 않고 그저 칼로 나뭇가지를 조각내기만 한 아이. 그 아이에게 남겨진 것은 그저 나무 조각들이었다. 작품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냥 나무 쓰레기일 뿐.
나무배와 나무 쓰레기.
이것은 우리의 삶의 모습을 비유한 예시였다. 아이에게 주어진 나뭇가지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과 같다.
똑같은 삶이 주어 졌지만 어떻게 그 삶을 살아내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나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결과에 따라서 삶을 평가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목사님의 말씀도 그런 요지의 말씀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칫 잘못 받아들이면 성공한 삶이 좋은 삶이요, 바람직한 삶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나뭇가지로 배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 아이가 잘했고, 성공한 것이다. 반대로 나무 조각을 낸 아이는 잘하지 못했고, 실패했다. 이 시대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성과를 얻어야만 성공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했다고 본다. 우리가 너무 많이 들어온 이야기들이고, 사회에서 들려오는 메시지들이다. 이런 명제들이 나의 무의식에도 암암리에 박혀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무배를 만든 아이에게서 본받을 점이 없는 것일까.
나는 이 이야기에서 내가 배울 점은 나무배를 만든 아이의 상상력과 주체성이라고 생각했다. 나뭇가지를 보고 배를 상상한 점. 다른 말로 하면 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의 삶에 꿈이 있는 것이다. 꿈을 꾼다는 것은 현재에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미지로 그려본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나뭇가지를 보며 언젠가 완성될 배를 시각화하였다. 나도 현재의 나, 혹은 몇 년 뒤의 나를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상상한 것을 구체적으로 이미지화시키고, 그것을 말로도 표현해보고, 조금씩 그것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디뎌보면 언젠가 내가 그렸던 나의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큰 바위 얼굴’이라는 동화책에 나오는 주인공 어니스트처럼 말이다. 꿈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면 이처럼 내 삶에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사회가 말하는 성공, 다른 사람이 가르쳐주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묻고 찾아가는 자기 주도적인 삶. 그런 삶이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나뭇가지를 그저 열심히 칼로 베고 조각을 낸 그 아이에 대해서는 낮게 평가를 해도 되는 걸까?
주어진 칼로 열심히 나무 조각을 낸 것이 정말 의미가 없는 것일까? 스스로 꾸는 꿈 없이, 주어진 삶에서 그저 열심히만 살아온 사람들이 있다. 자기의 꿈보다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온 사람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고,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었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지만 정작 가족과의 관계도 멀어진 늙은 아버지의 이야기들을 주변에서 혹은 소설이나 드라마에 많이 등장한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그 삶이 멋지지 않아 보인다고 해서 쓸데없고, 의미 없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결과는 아름답지 않아 보일지는 몰라도 모든 이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삶을 지속해나가고 살아가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온 그 발자취를 실패한 삶, 잘못된 삶이라는 평가를 누가 감히 내릴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게 혹은 남에게 상처를 남길 수는 있지만 그래서 더 위로와 사랑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두 아이가 만든 나무배와 나무 조각에 집중하기보다 그냥 나뭇가지에 더 초점을 두고 생각해보았다.
두 아이에게 나뭇가지가 주어졌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이 이야기는 시작할 수 조차 없다. 누군가가 두 아이에게 나뭇가지를 줬다는 것. 그것은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삶이 주어졌다는 것. 삶이 주어진 것은 내가 원해서 생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어졌다. 그것에는 누군가의 뜻이나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뭇가지와 칼이 주어졌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주어진 삶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삶을 내가 포기하는 자의 모습과 같다.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라기보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 속에 수동적으로 나를 두는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생이 아무 의미가 없는 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창하고 그럴듯한 의미가 있어서 그것을 쫓아 바쁘게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삶 자체로 모든 이에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야기는 재미가 없다.
나는 이왕이면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진행이 되면 좋겠다. 나의 삶이 재미있는 이야기로 흘러가면 좋겠다. 재미있는 이야기에는 즐거움도 있고, 어려움도 있다. 즐거우면 즐거운 데로, 힘들면 힘든 데로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삶이면 좋겠다. 비교와 경쟁의식 속에서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는지, 인정을 받을 수 있는지에 연연하여 성과와 성공을 바라는 삶은 주체적인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 되어서 인생의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성장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다. 이 사회가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차고, 그런 모두로 인해 멋진 세상을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