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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씨네 Feb 11. 2017

'얼라이드' & '폴링 스노우'

내 아내는 스파이? 슬픈 스파이들의 자화상들...

*영화 '얼라이드'와 '폴링 스노우'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었습니다.


스파이 영화 좋아하시나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스파이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액션만 강조하는 영화에 대한 부담감 때문일까요? 분명한 것은 ‘본’ 시리즈보다 ‘007’ 시리즈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처럼 위트가 있는 스파이 영화가 저는 더 마음에 드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처럼 날카로운 수위를 자랑하는 장면들이 등장하거나 멜리사 맥카시처럼 대놓고 웃겨주는 ‘스파이’도 좋았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런 스파이 영화는 어떨까요? 액션은 별로 없지만 열정적인 사랑이야기로 가득한 스파이 이야기 말입니다. 오늘 간만에 키보드를 잡고 이야기하는 두 영화는 묘하게도 액션보다는 사랑에 초점을 둔 스파이 영화들입니다. 바로 ‘얼라이드’와 ‘폴링 스노우’입니다.









‘얼라이드’(원제 Allied, 2016)의 배경은 1924년 모로코 카사블랑카입니다.

영국 정보국 장교인 맥스 바탄(브레드 피트)은 프랑스 비밀요원 마리안 부세주르(마리옹 꼬띠아르)를 만나러 사막을 넘어 도시로 향합니다. 생판 처음 만나는 이에게 아내와 남편 행세를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완벽한 부부로 위장하고 미션을 완료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 하나의 부부가 되지요. 하지만 맥스는 마리안이 스파이 일 수도 있다는 상관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내 아내는 그럴 리가 없어...라고 얘기하지만 상관의 지령에 따라 가짜 정보를 흘리고 마리안의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마리안은 자신을 붙들고 있는 쪽에서의 감시와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맥스를 사랑함은 진심이었노라 말합니다.






자... 좀 더 뒤로 가볼까요?

영화 ‘폴링 스노우’(원제 Despite the Falling Snow, 2016)는 1959년 모스크바와 1992년 뉴욕을 넘나 듭니다.

사샤(찰스 댄스/샘 리드)는 조국을 위해 살던 청년입니다. 근데 그는 지령을 받고 망명 아닌 망명을 하게 됩니다. 갑자기 시대가 1992년으로 바뀌고 노년이 된 사샤는 러시아로 미술 작품 전시회를 준비하는 조카 로렌(레베카 퍼거슨)을 보내야 하는 상황입니다. 로렌은 거기서 기자라고 말하는 마리나(안트예 트라우에)를 만나게 되고 사샤의 반려자인 카티야(레베카 퍼거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게 됩니다.  


다시 상황은 1959년... 파티장에서 사샤는 카티야라는 여인을 만나 첫눈에 반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소련의 비밀정보를 가져오기 위한 사샤의 친구 미샤(올리버 잭슨 코헨/안소니 헤드)의 계략이었고 어쩔 수 없이 카티야는 이 일에 동참한 것이죠. 모든 진실이 들통나는 순간 미국으로의 망명 제안을 받지만 카티야를 놔두고 떠날 수 없는 사샤의 고민은 깊어만 갑니다.





두 영화 모두 스파이의 사랑이란 소재를 다룬 흔한 영화인데 그럴수록 뭔가 아쉬움이 남는 부분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얼라이드’의 경우 안전한 심의를 받기 위해 영화를 가위질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폴링 스노우’는 배우들의 연기에 비해 뜬금없는 동성애 코드나 굳이 1인 2역이 필요했는가 등의 아쉬움이 남는 영화들이었습니다.




보디가드의 철칙이 의뢰인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라면 스파이의 철칙 역시 암살을 해야 할 상대를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리고 그 어떤 동료도 믿지 말아야 할 것이고 그 동료가 이성이라면 사랑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 상대가 내 편이 아닐 수도 있고 언제든지 배반하고 변절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얼라이드’와 ‘폴링 스노우’는 묘하게도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영화입니다. 더구나 무기만큼이나 정보력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던 세계대전 시기의 상황에서 스파이의 역할은 더욱더 컸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랑하고 결혼까지 했는데 나의 남편이, 혹은 나의 아내가 스파이라면 기분이 참 묘하겠죠.


물론 우리나라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다룬 영화가 있죠. 바로 1999년 강제규 감독의 ‘쉬리’입니다. 현재 진행형인 남북 대치 상황은 결국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스파이라는 이유로 처단해야 하는 슬픈 상황을 보여주었지요.


시대가 지날수록 스파이의 존재는 희미할 것 같지만 여전히 스파이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존재합니다. 망명을 한 전직 러시아 스파이 요원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이나, 미국의 고급 정보를 유출시킨 과거 미국 정보국 요원인 스노든이 러시아 측에서 미국으로 소환될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은 여전히 이 시대가 냉전시대에서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간첩이나 스파이(나라의 기밀만 빼내는 것만이 아닌 기업의 정보도 빼돌리는)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등장하는 것도 그 어느 것도 해결되지 않은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데올로기를 얘기할 때 빨갱이, 종북, 좌파 타령을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을 스파이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우리는 불신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에 슬프면서 웃기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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