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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씨네 Apr 22. 2017

'토니 에드만' & '아버지와 이토 씨'

아버지와 딸... 사고뭉치 아빠에 대처하는 딸(자식)들의 자세.


*'토니 에드만'과 '아버지와 이토 씨'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버지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일에 지친, 하지만 일 밖에 모르는 워커홀릭? 아니면 내 새벽잠을 깨우면서까지 술에 취해 이것저것 주전부리를 사 온 것을 강조하고 잠들어 있는 내 뺨과 이마에 수염을 비벼대며 아직도 존재감 알리려는 그저 이상한 사람? 근데 주말에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놀이공원이며, 하다못해 뒷동산 가는 것도 두려워하는... 그런 나약한 사람?


신해철 씨의 ‘아버지와 나’ 혹은 싸이의 ‘아버지’에서 아버지는 볼품없는 사람이지만 한 편으로는 가장으로써의 역할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로 그려집니다. 우리도 나이를 먹지만 아버지가 나이를 먹으면서 자꾸 어린아이처럼 우리에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릴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오늘은 철없는 아버지와 그를 보살펴야 하는 딸들에 관한 영화 두 편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영화 ‘토니 에드만’과, 영화 ‘아버지와 이토 씨’입니다.






토니 에드만’(원제 Toni Erdmann)의 시작은 택배기사에게 장난을 치는 빈프리트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아내와 오래전 이혼하고 선생님으로서 삶은 곧 마감하려는 그저 평범한 남자이지만 틀니를 끼고 가발을 쓰는 순간 토니 에드만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장난을 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그 장난이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요.


딸 이네스는 회사의 인수합병을 도우면서 쓸모없는 직원은 해고를 시켜야 하는 역할입니다. (영화 ‘인 디 에어’의 조지 클루니의 역할과 약간 비슷하죠.) 당연 웃음이란 없고 활력이란 것도 없습니다. 다만 동료나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게 그나마 낙이죠. 그런 그에게 골칫덩어리 아버지가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지만 아버지의 장난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다시 틀니와 가발을 쓴 토니 에드만이 이네스에게 다시 다가오게 되지요. 아예 이네스는 한 술 더 뜨기로 합니다. 현장에서 자신이 사람을 해고시키는 일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를 아버지에게 직접 보여주기로 한 것이죠. 그리고 술과 약에 취해 사는 자신의 슬픈 모습까지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반려견의 죽음을 보고 나서 빈프리트는 자신의 생도 얼마 남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딸을 만나러 온 것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 딸의 마음을 쓰리게 만들었죠. 인생을 즐기면서 살자고 말하지만 바쁘게 사는 딸에게 그런 말이 통할 리가 없죠. 빈프리트는 결국 털북숭이 가면(이 가면의 이름은 ‘쿠케리’로 실제 불가리아의 전통 가면이라고 합니다. 악귀를 쫓고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고 합니다.)을 쓰고 나타나 다시 한번 딸에게 다가가죠.




일본으로 넘어가면 여기엔 독특한 세 식구가 불안한 동거를 하는데 이쪽도 만만치 않습니다. 영화 아버지와 이토 씨'(원제 My Dad & Mr Ito / お父さんと伊藤さん)의 아버지 역시 아무 통보도 없이 딸과 남친이 있는 집에 무작정 들어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죠.


딸 이야는 아직 확실한 직업이 없는 30대 여성입니다. 편의점에서 알바를 했었고 거기서 만난 50대 중반의 이토와 동거를 하게 됩니다. 현재 이야는 편의점을 떠나 서점에서 일하고 있으며 이토는 초등학교 급식 도우미로 일하고 있습니다. 일흔을 넘긴 이야의 아버지는 전직 교사였으며 정년퇴임을 한 상황입니다. 아내는 오래전 세상을 떠났고요.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이야의 오빠 집에서 얼마 전까지 살았으나 오빠의 자녀들이 중학교 입시를 봐야 하는 상황이고 오빠의 아내는 그의 아버지만 봐도 구토를 일으킬 정도로 심각한 노이로제에 걸린 상황입니다. 그러니 오빠가 여동생인 이야에게 사정사정하는 것도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죠.


그런데 아버지 역시 황당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딸이 환갑을 바라보는 남자와 동거를 한다는 것도 놀랍고 직업도 변변치 않은 남자라는 부분도 신경이 쓰입니다. 아야가 숟가락을 빠는 버릇도 마음에 안 들고 돈가스에 우스타 소스를 쓰지 않는 것조차도 맘에 안 듭니다.


아버지와 불안 동거를 한 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아버지는 숨기는 것이 여간 많습니다. 정체불명의 상자와 대형 마트에서 뭔가를 만지작거리는 모습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입니다.










‘토니 에드만’과 ‘아버지와 이토 씨’는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는 영화입니다. 전직 교사였던 아버지가 사고를 일으키고 그 뒷수습은 딸이 하고 있다는 것이죠. 어머니의 부제라는 점도 동일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집까지도 닮아있죠.


‘토니 에드만’에서는 치즈 강판이, ‘아버지와 이토 씨’에서는 숟가락이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합니다. 식구가 오붓하게 식사를 하고 멋진 하루를 꿈꾸지만 자식들은 다 컸고 아내들은 더 이상 자신을 돌봐주지 않는 그야말로 고독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죠. 그런 아버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고 심술을 부리는 것입니다. 반대로 역전당한 것이죠.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된 아버지는 아이처럼 어리광과 심술을 부리는 것... 모두가 다 떠난 한적한 공원에서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장면 역시 두 영화 동일합니다. ‘토니 에드만’은 쿠케리를 쓴 아버지의 뒷모습이, ‘아버지와 이토 씨’에서는 불이 환하게 켜진 집들을 바라보며 어두컴컴한 공원에 앉아있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두 영화는 그렇다고 우리에게 효도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도 (이미 어른이긴 하지만) 곧 그렇게 더 자라나서 아버지 같은 어른이 될 때 자식들이 우릴 기억할까라는 서글픔에 대해 묻는 것 같습니다.


효도하자고 떠들지는 않겠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저 역시도 그렇게 효자는 아니었고 지금도 가끔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던 적이 있는 철없는 사람이니깐요. 거창한 것 필요 없습니다. 물질적인 효도도 좋겠지만 부모님에게 안부 전화 한 통이야 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효도이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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