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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씨네 May 07. 2017

'보안관' & '언노운 걸'

정의와 오지랖 사이... 오지랖이 없다면 정의도 없다.

※영화 '보안관'과 '언노운 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본인 자신을 정의롭다고 생각하시나요?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에는 누구보다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근데 그 정의라는 게 좀 심해지면 오지랖이 되는 경우가 있죠.

저요? 저는 오지라퍼에 가깝습니다.

눈꼴사나워서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용기는 없고...

그렇다 보니 매우 소심하게 자기주장을 이야기하는 그냥 그저 웃기는 아제, 참견쟁이, 오지라퍼가 된 것이죠.

당신은 정의의 용사인가요? 아니면 오지라퍼인가요?

전혀 다를 것 같지만 결국은 같은 얘기...

영화 '보안관'과 '언노운 걸'입니다.












영화 '보안관'(영문원제 The Sheriff In Town)의 대호는 잘 나가던 형사였습니다. 하지만 마약 수사를 하던 도중 동료를 잃고 범인을 놓쳐버린 상황입니다. 그는 과잉수사를 했다는 이유로 경찰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고 부산 기장으로 내려온 그는 보안관을 자칭하며 마을의 여러 대소사를 맡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들어서는 비치타운 공사와 관련해 반대 시위를 하러 나서던 도중에 종진이라는 사내를 만납니다. 다시 시간은 앞에 마약 수사가 있던 시절로 돌아갑니다. 범인은 모두 놓쳤던 대호는 초짜 마약범인 종진을 만나게 됩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거기에 초범이라는 것이 인정되어 대호는 최대한 종진에게 가벼운 형량을 줄 수 있게 도와주고 그렇게 그는 경찰 옷을 벗게 됩니다.


은인이니 당연히 종진이 대호에게 극진 대접을 하는 게 이상하지 않죠. 하지만 대호는 갑자기 부산에 마약이 들어온 소식과 종진의 등장이 의심스럽기만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을 도와주는 외지인을 처음에는 경계하지만 모두 종진의 편이 되고 대호의 반응을 못마땅해합니다.





이번에는 프랑스로 가보죠. 영화 '언노운 걸'(The Unknown Girl / La fille inconnue)에는 작은 병원과 이 곳에서 일하는 매력적인 여의사가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제니로 노(老) 의사를 대신해 작은 병원일을 맡고 있습니다. 같이 일하는 레지던트 의사인 줄리안은 제니에게 뭔가 불만이 많아 보입니다.


근데 일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병원 업무가 끝난 시간 벨이 울렸고 앞에 거품을 물며 쓰러진 소년 환자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건 물론 서류를 건성건성 작성하고 있던 줄리안에게 제니가 화가 많이 났던 모양입니다. 업무 시간 끝났으니 문을 열어줄 필요는 없다고 말입니다.


다음 날... 경찰이 찾아와서는 병원에 벨을 누르던 흑인 소녀가 근처 강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왔던 것입니다. 이후 제니는 자신의 소홀함과 무책임으로 소녀가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수소문을 하기 시작합니다. 소녀의 이름이라도 알고 싶은 제니의 마음...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경찰은 그녀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행동을 하고 있다고 그를 말립니다. 심지어 살벌한 협박과 항의도 당합니다만 그럴수록 제니의 고민은 더 해갑니다.








자... 여기서 문제.

두 영화 중 어느 게 오지랖이고 어느 것이 정의구현인지 구분이 되시는지요?

사실 두 개 모두 오지랖으로도 보일 수도 있고 반대로 정의구현으로도 보일 수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그 동기는 확실합니다.

'보안관'의 대호는 동료를 잃은 상황에서 자신이 이 마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대소사를 도우면서 어려운 사람은 돕고, 나쁜 사람은 벌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철없는 처남과 한 편이 되어 영화 '영웅본색'에 열광하며 정의구현을 나서는 것이 오지랖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좀 과격하고 무식해 보인다는 단점이 있지만요.)


'언노운 걸'의 제니 역시 마찬가지예요. 사실 제니는 큰 잘못이 없습니다. 소녀는 다른 불순한 의도를 저지른 어른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되었지만 그것이 제니와 큰 연관이 있는 게 아니고 제니의 병원은 잠시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문을 두드린 그 수많은 곳들 중에 한 곳일 테니깐요. 그럼에도 제니가 미친 듯이 소녀의 이름을 알려고 했던 이유는 단 하나. 억울하게 죽은 소녀를 위로하는 비석 하나에 이름 하나는 새겨 넣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줄리안이 제니를 멀리 한 것도 그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진짜 의사가 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었죠. 제니가 그 이름 없는 소녀로 인해 의사로서의 죄책감을 갖았던 것과 같은 의미일 수 있지요.)



두 영화는 성격이 다른 영화입니다. 김형주 감독의 '보안관'은 그냥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오락영화일 뿐이고 다르덴 형제의 '언노운 걸'은 전작인 '내일을 위한 시간'이나 '자전거를 탄 소년'처럼 사회 비판이 강한 이야기를 만들었던 감독들이라서 확실히 극과 극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엉뚱하게 두 영화를 묶은 이유는 '정의와 오지랖의 경계는 어느 선 일까?'라는 고민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란 말이 있습니다만, 어느 선에서 보느냐에 따라 쓸데없는 오지랖이 될 수 있고 슈퍼히어로에 버금가는 정의구현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원초적인 질문을 하나 해보죠.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담배를 피우는 중고등학생들이 있고 그 학생들이 설상가상 젊은 또래 여학생을 희롱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냥 지나가도 되는 상황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두 영화의 상황을 빗대서 얘길 하자면 '보안관'의 대호처럼 그 여학생을 구출하고 히어로가 되느냐, 혹은 '언노운 걸'의 제니처럼 모른 척 지내다가 평생 괴로움에 살 것인가입니다. 제 글이 항상 그렇지만 이 질문에 답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걸 강요하고 싶지 않고요. 하지만 내가 나설 수 없다면 전화로 112를 누르거나 가까운 경찰서로 가서 제보를 하고 그 자리를 뜨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일 수 있겠죠.


당신은 히어로도 아니며, 오지라퍼도 아닙니다.

다만 적어도 우리는 방관자는 되지 말자는 것입니다.

선거에서 올바른 사람을 뽑고,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며, 다양한 활동으로 정의에 대해 고민해본다면 그것은 진정한 히어로이자 멋진 오지라퍼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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