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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씨네 Jun 09. 2017

'걷기왕' & '용순'

소녀, 달리기로 작정하다. 꿈과 현실에 방황하는 청춘들에게...

※영화 '걷기왕'과 '용순'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달리기는 잼병입니다.

짧은 다리와 잠시만 뛰어도 헐떡거리는 일이 많죠.

그러나 몇 년 전에는 짧게나마 10Km 건강달리기 대회에 나갈 만큼 건강을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삶은 힘듭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아프니깐 청춘이다'라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도 줄어들었고요.

왜 청춘들만 아파야 하고 괴로워야 할까요?


오늘은 공교롭게도 육상을 하며 청춘을 향해 달리는 두 소녀의 이야기를 가져왔습니다.

영화 '걷기왕'과 '용순'입니다.








'걷기왕'(2016, 영문원제 Queen of Walking)의 만복은 어렸을 때부터 선천적인 멀미 증후군에 걸린 소녀입니다. 귀에 붙이는, 마시는 멀미약도 소용없을 정도로 구토와 어지러움증에 시달리지요.

그런 그에게 최대의 난관이 닥쳐오는데 다름 아닌 고등학교 진학을 하면서입니다. 버스로는 그럭저럭 갈만한 거리지만 학교까지의 거리는 두 시간, 왕복이면 네 시간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오기 때문이죠. 그러나 어쩔 수가 없는 상황. 만복은 내키기 않지만 네 시간의 등교를 위해 남보다 일찍 일어나기로 합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담임은 만복에게 경보 선수를 제안하게 됩니다. 장거리 경기지만 절대 달려서는 안 되는 종목인 경보에 얼떨결에 선수로 활약하게 되는 것이죠.






'용순'(2016, 영문원제 Yongsoo)의 용순 역시 육상부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만복과 달리 육상을 하게 된 이유는 좀 다릅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어머니는 시한부 삶을 살게 되었고 어머니의 첫사랑이 나타나면서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관계는 멀어집니다. 이후 아버지는 몽골에서 새 신부를 맞이하여 재혼하게 되었고 용순과 아버지의 관계도 멀어집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해방구가 바로 육상부였던 것이죠. 그리고 용순은 기간제 교사이자 육상부 감독인 체육 선생님과 사귀게 됩니다.








'걷기왕'의 백승화 감독은 다큐 '반드시 크게 들을 것' 시리즈로 뮤지션의 면모와 음악 다큐의 가능성을 보여준 감독으로 이번 작품에서도 음악적인 감성과 멋진 영상으로 다큐가 아닌 창작물로써의 가능성도 보여주었습니다. '용순'의 신준 감독은 신인이지만 자신의 전작이자 '용순'의 시발점이 되는 단편 '용순, 열 여덟번째 여름'을 선보인 감독으로 이 작품을 장편으로 만든 것이죠.


묘하게 두 영화의 배경은 육상부라는 점과 농촌마을, 더운 여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두 영화 모두 청춘에는 걸림돌이란 있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물론 그 걸림돌이란 것도 그들의 발목을 잡지만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걷기왕'의 만복처럼 어른이 요구하는 것에 일일이 응할 필요는 없으며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면 되는 것이죠. 엔딩에 새로운 희망을 위해 걷는 것처럼 말이죠. 어쩌면 적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짝퉁 나애리와 하니(이진주 작가의 원작 만화 '달려라 하니'의 등장인물들) 같은 상대편 선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일 수도 있거든요. 직진을 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현실상 직진을 할 수 없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장애물을 넘고 내 힘으로 개척하는 게 맞지요. 만복이 경보 대회에 가기 위해 버스행을 포기하고 서울까지의 거리를 도보로 가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그에 비해 '용순'은 약간은 어둡지만 용순을 포함한 소년과 소녀의 모습을 통해 시련의 아픔 속에서도 결국 청춘은 자라나고 그 상처 역시 금방 치유되고 있음을 들려줍니다. 체육선생이 영어선생과 바람(외도나 불륜의 의미의 바람이 아닌 이 영화에서는 다른 의미로 등장합니다.)이 나는 과정과 임신 소동이 단지 소동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첫사랑의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과 분열된 가족이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을 인상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한 번에 모든 관계가 봉합될 수는 없습니다. 상처치료 연고가 한 번에 효과를 보는 것이 아닌 서서히 그 딱지가 아물면서 상처가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죠.






'아프니깐 청춘이다'라고 말하고 그냥 견디면 된다고 어른들은 충고합니다.

철 모르던 어린 시절 저는 그게 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잘못된 답안지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닌가라는 미안함이 듭니다. 앞에도 말씀드렸지만 획일화된 모범답안은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답안이 주관식이 되어야 하지 객관식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넘어가는 열 여덞, 열 아홉의 나이...

당신의 청춘은 어떠했나요? 그리고 지금 어른으로 살면서 만족하시나요?

소년, 소녀들이 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멋진 도착을 위해 격려하고 아껴주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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