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냥 '검은 머리 소녀'... 아니 더 줄여서 그냥 '소녀'라고 하도록 하죠.
소녀는 술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어우러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 그녀를 좋아하는 선배가 있습니다. 선배는 우연을 가장하여 그녀를 만나기 시작합니다. 소녀는 이 선배의 이상한 우연을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
선배는 소녀를 위해 그녀가 어릴 적에 읽었던 동화책 '라타타탐'이 심야 중고책 장터 행사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더 이상의 우연은 없고 그녀를 잡아야 합니다. 한편 소녀는 동네 최고의 술꾼과의 대결에서도 승리하고 대학 축제의 게릴라 연극의 여주인공으로 얼떨결에 낙점되어 활약 아닌 활약을 하게 됩니다.
소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연극에 출연하고 학교 행사의 치안을 담당하는 꽃미남 사무국장은 게릴라 연극 팀을 쫓고 있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이 두 작품은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작품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는 극영화고 하나는 애니메이션이니깐요.
하지만 묘하게 이 두 영화가 교차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술을 사랑하는 여성들이라는 점과 그들이 술을 사랑하는 방식, 청춘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소공녀'의 미소는 술과 담배만큼은 죽어도 끊을 수 없습니다. 가사 도우미로 고된 일을 마쳤을 때 피는 담개 한 개비와 단골 가게에서 마시는 위스키 한 잔은 적어도 그녀의 피로를 잠시나마 해소시키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담배값이 인상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나하나 지워야 하는 상황입니다. 보통사람이라면 이 술 담배를 포기하겠지만 미소는 특이하게 집을 포기합니다. 어차피 가구도 없었고 그녀의 방안에는 추운 겨울에도 끈기 있게 살아가던 바퀴벌레 한 마리가 전부였으니깐요.
남자 친구인 한솔과는 뜨거운 관계지만 추운 단칸방에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섹스를 하기에는 무리였고 사치였습니다. 한솔이 '봄에 하자'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은 웃기는 장면이면서도 씁쓸한 장면이기도 하죠.
미소는 친구들을 찾아 나섭니다. 식사할 시간도 아까워 그 시간에 포도당 주사를 맞으면서 휴식을 취하는 직장인 문영, 시어머니와 남편도 포기한 요리 솜씨를 지녔지만 아직도 한구석에는 열정이 살아 있는 현정, 힘들게 장만한 아파트를 아내와의 이혼 때문에 놓칠 수 없는 대용,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지만 사랑에 너무 목마른 록이, 그리고 친구들 중 남부럽지 않은 부자로 살아가지만 자신의 과거가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정미까지...
친구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미소를 쫓아내거나 미소 스스로가 집을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사이 그녀의 또 하나의 희망들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한솔이 돈을 벌기 위해 외국으로 떠났고 마지막 그녀의 희망이자 보루였던 술값이 올라버린 것입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이하 '아가씨')의 소녀는 그 사람이 누구건 간에 친화력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죠. 그런 그에게는 다양한 친구들이 있고 아는 사이도 아닌데도 여러 단체의 행사에 꼽사리(?)를 끼며 술을 마시게 됩니다. 짱구의 엉덩이 춤을 능가하는 '궤변 춤'을 추면서 말이죠.
야한 그림을 수집하던 남지인 도도가 그림과 책 수집가이자 엄청난 부를 지닌 사채업자 이백의 사채 빛에 시달리자 소녀는 이백과의 술 대결을 벌여 승리하게 됩니다. 근데 후반부에 들어서면 이백은 알고 보면 외로운 노인이라는 것이 보이죠.
지독한 감기가 온 마을을 덮치는데 그것의 원인이 이백이 옮긴 지긋지긋한 외로움이 바이러스가 되어 온 마을에 감기로 이어지게 된 것인데 이것을 물리친 것이 바로 이 소녀였던 것이죠. 유일하게 감기에 걸리지 않았으며 외롭지 않으며 삶을 유쾌하게 살았던 것이죠.
그녀는 역시 많은 사람들을 찾아 나섭니다. 당돌한 여인 하누키와 자신의 순애보를 게릴라 연극으로 꾸며냈던 빤스 총장 커플에게 자신이 만든 차를 선물하고 도도를 만나 선배의 진심을 듣게 되고 이어서 이백을 만나고 어쩌면 사랑이 필요했던 사무국장도 만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짝사랑했던 선배를 만나러 간 것이죠.
그 모든 여정이 끝났고 누군가에게는 길었을지도, 한 편으로는 누군가에게는 짧았을지도 모르는 기나긴 밤을 보내게 된 것이죠.
사실 두 작품이 만들어진 계기를 확인하다 보면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의 경우 젊은이들의 청춘에 대한 이야기를 이야기하던 영화사 광화문 필름의 네 번째 작품인데 '1997, 면회', '족구왕', '범죄의 여왕'에 이은 각박하게 살아가는 청춘들의 삶을 블랙 코미디로 엮어나가고 있는데 이 작품 '소공녀'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마지막에 쿠키 영상으로 광화문 필름의 다음 작품을 예고편으로 보여주는데 다음 작품은 도심에 나타난 강시 이야기라는 점에서 궁금증을 유발하게 만듭니다. 분명 평범한 강시 영화는 아닐 테니깐요.
'아가씨'... 의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은 어쩌면 지브리 스튜디오가 주춤할 때의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신카이 마코토와 더불어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새 바람을 일으킬 감독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최근에 개봉한 그의 또 다른 애니메이션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만 보더라도 이 두 작품이 관객의 타깃도 전혀 다르고 한 가지 색감이나 작화 스타일이 아닌 각각 다른 방식으로 그려낸 점이 인상적이죠.
저는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 있는데 어린 왕자가 여러 별을 돌던 와중에 술꾼이 사는 별에 들어왔을 때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아저씨는 왜 술을 마시나요?'
"부끄러워서..."
"어떤 게 부끄러워서 술을 마시나요?"
"술 마시는게 부끄러워서..."
이 대답은 동문서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문현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기뻐서 술을 마시고, 슬퍼서, 화나서 술을 마십니다. 하지만 알콜의 힘으로 일시적으로 잊는 것일 뿐 그 어떤 것에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봅니다. 물론 적당한 음주는 건강에 좋다고 하지만 많이 마신다고 좋을 것 하나 없습니다.